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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Aug 11. 2020

빛의 과거, 은희경

자신의 색을 찾을 시간

<새의 선물>에서 작렬했던 은희경의 시니컬한 시선은  <빛의 과거>를 더해 날카롭게 파고드는데, 그 칼끝에 발끈하지 않고 관계를 이어가는 품새는 작가를 다시 보게 한다. 창과 방패가 한 치 물러섬 없이 외줄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이게 모순(矛盾)을 헤쳐가는 지혜이구나 싶다.

이야기는 1977년 여대생들의 기숙사 생활을 배경으로 한다. 기숙사 생활을 했다면 분위기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낯선 다름에 기대하는 미음은 언제나 크다. 아직 겨울의 끝자락인 3월 김유경은 두 손에 짐보따리를 들고 상경해 대학 기숙사에서 새내기 생활을 시작한다. 9시 점호, 흡연금지, 문제를 일으키고 퇴사한 학생들의 뒷이야기, 부사감의 히스테리, 단 한대 뿐인 전화와 "2시 30분 男"이 적힌 부재중 메모, 기숙사 철문 앞을 서성거리는 남자들, 경상도 출신 교수의 '배나' 발음이 '변화'라는 것을 알게 해준 집단지성, 딱딱한 빵과 우유, 연대 벌칙, 단체 미팅 이야기를 읽다보면 당대의 문화적 풍속도에 흠뻑 빠져든다. 응답하라 1977 시리즈랄까. 어수선한 시국 상황에서도 사람을 만나고 다투고 헤어지고 다시 부대끼는 과정은 여자 기숙사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빌렸을 뿐 청춘들의 방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청춘들의 방황으로 단순 분류해 버린 독자의 무례함을 힐난이라도 하듯 푸르른 5월을 시작으로 날이 선 메스를 들이댄다. 김유경은 초중고 시절 나름 모범생이었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문제를 내고 점수를 매기는 권력에 정답을 추는 것으로 순종했을 뿐 자신의 의지로 개척한 길은 아니었다. 그래서 서울로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리는 과정은 철저히 기존의 나와 단절이었다. 짐을 정리하는 내내 카세트라디오로 이연실의 '조용한 여자'를 반복해서 들었고, 리젝 버튼을 눌러 카세트테잎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으로 짐싸기를 마쳤다.

하지만 중간고사를 마치기도 전에 유경은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왔다.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지대에 갇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마치 학교 복도에서 입에는 흰 가루가 가득한 칠판 지우개를 물고, 두 손을 든채로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딩때는 선생님이 주신 벌칙이었다지만 지금은 주위를 둘러봐도 핑계댈 존재가 없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유경은 자신이 꾸는 꿈에 현혹되어 있었고, 잠과 미망에서 깨어나지 않기만을 바랐다. 공기가 희박해져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는 막다른 곳이라해도 눈 한번 질끈 감으면 지나가겠지 싶었다. 상대에게 느낀 모욕감은 그것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서 회피했다. 삶의 고삐를 회피라는 방편에 넘겨 주고 자신은 객이 되어 회피가 이끄는 대로 휘둘렸다. 회피라는 기제는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는다. 바깥에서 오는 난관은 물론 안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욕구에도 눈을 감아주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지 못했던 유경은 결국 욕망이 없는 사람이 되었고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삶의 방식도 한번 굴러가기 시작하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굴러간다. 하지만 유경 자신에게도 주위에게도 어느 선까지였다. 눈 앞에 상황에서는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모하게 했지만 삶의 연비는 최악이었다. 더해서 주위 사람의 연비까지 떨어뜨렸다. 유경을 운명이라 여겼던 이동휘는 변덕스러운 사랑 앞에 자기가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유경에게 필요한 무엇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만은 알았고, 이별편지를 남기고 궤도에서 떨어져 나갔다.

돌아보면 덫을 친 것도 나였고 덫에 빠진 것도 나였다. 유경은 모범생 흉내를 냈고, 친구 따라 강남가듯 수습기자를 자청했으며, 길거리 헌팅처럼 타인의 행동력에 의해 결정된 결혼 역시 뒤집지 못했다. 모범생 흉내는 자신을 지긋지긋한 고향과 부모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고, 수습기자와 결혼 역시 기존의 껍데기를 벗기 위한 새로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최악이었던 삶의 연비는 출발지점부터 연료등에 빨간불을 들어오게 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유경은 덫이 없는 곳은 세상에 없고, 덫에 빠지지 않겠다고 바둥거리는 것이 바로 덫에 빠진 순간임을 실감했다. 케이트 밀릿의 <성의 정치학>을 읽기 전에 이미 자신은 '정숙 노력 순결'이라는 집단적 무의식에 익숙한 여자였다. 말더듬이는 자신의 뒷다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말을 떼지 못한 기자에게 느는 것은 작문 실력이고 잃어버린  것은 기자라는 자신의 꿈 자체였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빠진 덫은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여부는 내가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내게 영향을 미칠지는 선택할 수 있어야 했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지 못한 벌로 유경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이중의 삶을 살아야 했다. '보여지는 나'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바라보는 나'는 허깨비 같은 자신을 붙들고 감성과 이성을 넘나들면서 끝나지 않을 씨름에 허덕였다.

작가는 유경의 삶을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바닥까지 끌어내리고선 유경과는 판이한 삶을 살아낸 김희진을 통해 결이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경이 보지 못했던 쪽에 대한 조망도 있지만 박탈에 강박관념을 가진 희진의 시선은 낯설고도 새롭다.

희진이 기숙사 문을 들어섰을 때 그 곳은 욕망과 차별이 가득한 공주들의 성이었다. 희진이 이제부터 시작되는 긴 경주를 통해 얻어야 할 것들을 공주들은 이미 갖고 있었다. 희진은 꽉 끼는 스커트와 조끼 유니폼을 입고 하루 종일 웃으며 서 있는 백화점 판매원 언니로부터 학비를 지원받았고, 고향을 떠나와 생활전선에 뛰어든 여자들을 알았다. 변두리 골목 조명이 켜진 쇼윈도 아래 한복 차림으로 앉아 있는 여자들, 공장직공, 미싱사, 숙식이 제공되는 비어홀의 여급의 삶도 알았다. 유경은 약점이 드러나는 상황이면 대처해왔던 방식 그대로 노력하고 준비해야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지만 아무런 대책 없이 맞이하는 두려움과 불안 앞에서는 반사적으로 몸을 숨기고 피했다. 희진에게 유경의 그런 회피는 가장 비겁한 악(惡)이었다. 절박한 사람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자기도취적이며 위선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녀(김유경)는 문학소녀를 벗어나지 못한 유치하고 가식적인 인물이다. 또한 에고의 껍데기 안에 갇혀 세상을 자기 위주로 관찰하고 분석하는데, 그것이 오독이기 때문에 자주 비관적인 일기를 쓸 수밖에 없고 겉멋 든 자기 연출도 필요하다. 자기 의견을 쉽게 드러내지 않다가 결국에는 원하는 것을 차지하는 그녀를 공주 중에서도 ‘세 번째 공주’로 분류한다.(p165)

각자의 기억은 그 사람의 사적인 문학이다.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p334)

그렇다면 삶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덫 속에서 곤궁한 것들에 둘러싸여 그 안에서 비교적 좋은 것을 찾아내야 했고 그 결정을 합리화하는 데서 얻는 평화가 진실일까. 아니면 악착같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기억을 편집해서 우겨서 얻어낸 평화가 진실일까. 유경과 희진의 삶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왜곡일까? 나는 나를 누구로 알고 살아왔던 것일까?

유경과 희진은 같은 공간과 시간대를 공유했지만 자석의 두 극처럼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1977년은 세상을 두려움과 불안으로 왜곡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오해하며 미워하던 시기이면서, 또한 세상에 호기심과 사람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렇게 굽이치며 흐르는 강물에 정해진 진실은 없을 것이다. 과거로부터 오는 빛은 진실게임이 아니며, 손을 뻗어 붙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트랙이 원형인지 타원인지 알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바퀴를 도는 고통을 겪어야 하지 않던가.

일곱색깔 무지개가 고운 이유는 누구 하나 자기 색깔을 잃지 않고 뽐내기 때문이다. 빛의 과거는 어느 지점에서 자신의 색깔을  잃어버렸는지 돌아보게 한다. 기억이 왜곡되고 지워지는 시점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지금은 없는 공주들'은 물론 우리 자신의 색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경과 진희는 과거의 빛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이제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지우고 왜곡시켰던 어두운 그림자에 용서를 비는 것으로 '빛의 과거'를 놓아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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