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윌마 Oct 19. 2020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자신의 미래는 변화하는 과정의 총합으로 인식해야

다시 읽게 하는 책이다. 앞에 읽은 내용이 부끄러워 다시 읽게 되는 책이다. 상황에 겨워, 사람에 겨워, 무엇보다도 나에 겨워 풀지도 맺지도 못한 채로 망각에 묻어버린 매듭은 강물이 역류하듯 돌아와  나와 대면한다. 대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있다.
특별히 재미나지도 그렇다고 실망스럽지도 않을 만큼의 노년을 보내고 있던 주인공 웹스터에게 어느 날 과거로의 초대 편지가 도착한다.
그렇게 시작된 과거 기억에 대한 회상은 소싯적 어울렸던 친구들 이야기로 시작한다. 비극의 주인공이고 싶고, 죽음도 불사할 사랑을 나누고 싶지만, 대부분 대책 없는 상상일 뿐이다. 닭장을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꿈꾸지만 이를 뒷받침해 줄 지적 토대도 배짱도 없다. 더군다나 돋보이는 지성에 한 걸음 한 걸음 준비된 삶을 살아가는 친구 에이드리언 앞에서는 더 초라해질 뿐이다.
첫 여자 친구 베로니카와의 교제 역시 ‘미만의 섹스’라는 표현이 의미하듯 사랑도 사람에 대한 관계의 깊이도 어느새 한계에 이른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선명함이 없는 인생 앞에 평소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에이드리언과 헤어진 여자 친구 베로니카의 결합은 큰 상처로 다가오지만 웹스터는 자기 안의  생존 본능을 발휘하며, 자신을 망가뜨릴지도 모를 무언가에 휘말리지 않으려 한다. 궁극의 지점에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 없이, 종국에는 자신을 배신한 그들의 윤리적 가책에 대한 본인의 생각에, 베로니카에 대해 신중할 것을 권하는 충고의 내용을 보태고, 마지막으로  에이드리언에게 행운을 비는 내용의 편지를 붙인다. 그리고선 그 둘을 평생 잊기로 매듭짓는다.
이후 졸업과 일반적인 사회생활, 그리고 뜻밖의 에이드리언의 자살, 마가렛과의 결혼과 외동딸 수지와의 관계, 이혼과 은퇴에 이르기까지의 1부의 이야기는 승리자도 패배자도 아닌 ‘살아남은 자’의 회고를 담고 있다.
아무리 참을성 있는 독자라고 해도 1부의 마지막에 도착해서 내뱉게 되는 불평은 당연해 보인다.
1부를 읽는 내내 불충분한 기억이 불충분한 기록과 만나는 지점에 기반한 주인공의 내러티브는 맨 부커상 수상작이라는 높아진 기대치에 비하면 창백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는 작가의 의도된 설정으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제목에서 풍기는 반전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여준다.
2부의 시작은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하는 주인공 웹스터를 설명하면서, 친구의 아들 밴드의 ‘모든 날이 일요일’이라는 제목을 가진 노래 하나를 이야기한다. 가사가 어떻게 되느냐는 주인공의 질문에는 노래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날이 일요일’이라는 말만 하고 또 하다 끝난다는 답변을 보면서 반스 특유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씁쓸한 유머와 만나게 된다.
자신을 배신한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평범하게 회신했다던 1부의 편지는 2부에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를 퍼붓는 내용의 답장으로 돌변한다. 40여 년 전에 자신이 보낸 편지는 분명한데 왠지 낯설다. 우리의 기억이, 그것도 자신 안에서만 가감되고 윤색되고 교묘히 가지치기되는 기억은 현재의 나와는 단절된 것이다.
‘그런데 난 변했거든’ 웹스터는 이렇게 자신이 변했다고 말한다. 과거와 단절되어 축적되지 못하고, 반성과 재인식이라는 과정으로서의 축적마저 빈약한 상황에서 스스로 외치는 자기 변혁은 착각이자 오만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보기에도 잔인하기 그지없는 편지를 앞에 두고서도 웹스터는 처음으로 돌아가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타인의 경멸을 극복한다는 것의 묘미’를 얘기한다. 이런 허황된 기대심리는 베로니카가 자신을 다시 좋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미래의 모습을 사실화하고, 이를 현재의 자신에 투영하여 베로니카에게 접근한다. 베로니카 입장에서는 ‘여전히 감을 못 잡고 있구나’라는 경멸의 이야기만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 반스는 도착되어 버린 우리의 인식을 우회적 시선으로 지적하고, 같이 고민해 볼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해 간다.
1부가 주인공의 일대기를 흐르는 강물처럼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표현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닮은 구도라면, 2부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연관된 시간의 여행을 통해 주인공의 심리적 변화와 실제적 삶에서의 실천을 모색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떠올리게 된다. 1부와 2부의 각기 다른 구도의 결합은 종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소설의 극적 반전의 효과는 물론 스토리 간의 보완재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기억과 시간의 관계를 극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준다.
‘기억이라는 실재를 담고 있는 시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만만치 않은 사유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2부의 편지처럼 새로운 기억들이 우리를 엄습했을 때의 느낌을, 반스는 세 번 강의 역류하는 강물처럼 자연이 뒤집히고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고 말한다. 과거라는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가 버린 것이 아니고, 강물이 역류하듯 과거로부터 현재로 흘러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로부터 흘러온 시간은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맞는 방향성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축적이 현재인 것이고, 현재에 대한 반성과 재인식은 미래를 향한 변화의 과정으로써 의미가 있다. 현실의 도착된 모순을 거부하지 않고 타협과 부박함에 기반한 미래는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허상일 뿐이다.
책임이 있다. 그 순간 저 너머로 혼란은 시작된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거대한 혼란일 수 있다. 그 혼란 속으로 자신을 던질 것인가? 자신의 미래를 변화하는 과정의 총합으로 인식하기로 했다면 그의 늦은 처음은 제대로 감을 잡은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빛의 과거, 은희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