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사슴에 대한 이미지는 대부분 생과 사를 초월한 듯 한 곳을 응시하는 모습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월령공주>에서 본 생과 사를 관장하는 사슴 신이 기억납니다. 목이 길어 슬프고, 눈망울이 호수 같아야 사슴입니다. 긴 세월 동안 인류가 즐긴 추상은 우리 머릿속에 새로운 사슴을 만들어 냈습니다. 당신은 무심히 서 있는 사슴을 본 적이 있나요? 동물원 울타리에 갇혀 먹이를 갈구하는 사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숲에서 우연히 만난 사슴을 말합니다.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눈이 마주칩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습니다. 무심히 서 있는 것 같지만 그 사이에는 엄청난 긴장감이 흐르죠. 누군가 한쪽이 움직이기 전까지 그렇게 서 있어야 합니다.
4월의 봄 어느 날, 아파트 뒤에 있는 산이 시작되는 오르막에서 사슴을 만났습니다. 사슴은 아닐 겁니다. 최고 포식자가 사라져 개체수가 늘어난 고라니 정도겠지요. 고라니도 노루도 모두 사슴과에 해당합니다. 마른 낙엽이 밟히는 소리에 까치겠지 했는데 사슴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우연한 만남에 내가 더 놀랐습니다. 아쉬울 게 없는 내가 움직이니 사슴이 달아납니다. 내가 다시 깨달은 낯선 사슴입니다.
뒷동네 사슴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오늘 마주친 사슴은 또다시 무심히 서 있습니다. 분명히 나와 마주쳤는데 아무런 긴장감을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3M x 2M 캔버스 안에 그려진 사슴은 내가 아는 사슴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사슴이 없습니다. 사슴이 없다면 더 이상 사슴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다시 나는 사슴을 바라봅니다. 거친 붓질로 표현된 형체는 희미해지면서 간결해집니다. 형체는 드디어 사슴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집니다. 하얀 사슴은 이젠 누구라도 될 수 있겠다 선명하게 말합니다. 환상은 사라지고 이미지가 연결시켜 주는 관계들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오늘 만난 사슴은 나였습니다. 다음에는 당신일지 모릅니다.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인내하는 누구입니다. 무심히 숲 속을 거니는 자유로운 누구입니다.
사슴은 예전부터 소통의 아이콘입니다. 하늘에 제사 지낼 때 희생 동물이 되기도 합니다. 희생 동물은 하늘과 연결하는 힘이 있다고 믿어져 왔습니다. 삶과 죽음을 넘어 초월적인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인간의 모습을 대신해 줍니다. 그 자리를 호랑이나 곰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주는 섦김의 대상이지 소통의 매개체는 될 수가 없습니다.
작가는 작품에 사슴, 배, 오리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배는 강의 이편과 저편을 오갑니다. 이곳과 저곳을 연결해 줍니다. 배라는 공간 자체가 여백입니다. 여백은 곧 있을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게 하지요. 한자 을(乙) 자를 흘려 그린 것 같은 형상에서는 강을 타는 오리 특유의 리듬이 느껴집니다. 유유자적 유영하는 오리들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오리는 사라지고 군무가 보입니다. 거기까지 이르면 오리가 나를 어디로 끌어갈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그림이 수 만 명이 오고 가는 로비 중앙 벽면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우리를 맞이합니다. 아침마다 사슴이 우리를 맞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수많은 당신을 담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내일 다시 사슴을 만나러 오고 싶습니다. 당신을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이강소 작가의 꿈의 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