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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Dec 06. 2020

공터에서, 김훈

시선, 비극 그리고 그림


상품교환의 관계가 일반화된 요즘은 글을 쓰고 읽는 만남에도 얼굴 없는 생산과 소비가 깊숙이 들어습니다.  아래 오른쪽 왼쪽 손동작(Swipe) 하나로 지금의 인연을 끊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갑니다. 스마트폰 화면으로 스치는 인연을 붙잡기 위해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과 한 줄 요약은 필수고, 글의 분량도 화면 단위로 의미를 찾도록 구성해야 합니다. 그렇게 만나 드물게 이웃을 맺습니다.


여기에 절대 친절하지 않은 작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만 맺어서는 안 될 것 같네요. 그가 쓴 책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읽어야 하지요. 소설가 김훈입니다. 세잔은 모네를 '신의 눈'을 가진 화가라고 불렀습니다. 모네처럼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은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색채를 본능적으로 쫓습니다. 연못을 그린 <수련> 연작을 250점이 넘게 그렸습니다. 김훈은 칠순을 넘긴 지 꽤 되었습니다. 눈이 흐려질 만도 한데 우리 사회의 아픔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모네에 비할 만합니다. 김훈의 시선은 분석적입니다. 어머니의 울음을 단순히 울음이라는 단어 하나로 뭉개지 않습니다. 울음을 인지하고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습니다. 그리고 공감하고 경청합니다. 이미 울어버린 울음이 있고, 아직 울지 못한 울음이 있습니다. 다음 울음을 끌어내 주는 울음이 있는가 하면 터져 나오는 울음을 누르려는 울음도 있습니다. 렇게 울음의 광장에 선 이후에야 누군가의 조용한 일상 이면에 숨겨진 맹렬한 폭발성 에너지를 발견합니다.


김훈의 문체가 건조하다고 하지요. 다른 말로 하면 간결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쪼개고 나눠지는 분석의 섬세함을 만나게 됩니다. 나뉜 서로는 서로 주고받으면서 의존성을 갖습니다. 번지고 스미고 헤어지고 만납니다. 그리듯 표현적인 문체가 탄생하는 과정입니다. 김훈의 문체는 살점 하나 없는 직선 같다 가도 어느새 폭을 달리하며 흐르는 곡선으로 선명해집니다. 곡선은 파장을 타고 굽이치기에 마음의 울림은 커집니다.


김훈의 시선은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눈 감지 않습니다.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봅니다. 아버지 마동수와 두 아들 마장세 마차세의 삶은 특별하지 않은 우리 주위의 아픔입니다. 그리고 김훈 자신이 겪고 감내해 온 세월의 무게이기도 합니다. 아픔은 도처에 있지만 발 붙일 한 조각 땅도 찾지 못합니다. 아프다고 말을 하려 해도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말은 나오지 않고 아픔만이 토해 나옵니다.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그렇게 표현되지 않은 아픔은 보듬어지지 못합니다. 그렇게 말없이 끝도 없이 걸어야 합니다.


아플수록 각성된다는 아픔의 참뜻은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의 통증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아버지 마동수와 장남 마장세에게 가족은 상처의 통증을 상기시켜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집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 상처는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의식에 가깝게 아버지는 집에 오는 것이고, 장남 마장세는 서울에 있는 가족에게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은 나를 떠나게 하지만, 슬픔과 고통이 만들어 준 상처는 나를 돌아오게 합니다. 인연의 덫은 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일상에서 떠남과 돌아옴이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마동수는 균형을 잡기 위해 계속 묻습니다. 여기가 거기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 끊임없이 주위를 더듬거리며 두리번거립니다. 하지만 아픔이 토해진 축사 같은 공간에서 아픔은 그저 쌓이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삶의 균형은 무너집니다.


김훈은 자신의 기억 속에 서식하고 있는 아픔을 글로 표현합니다. 드러낸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요. 이젠 더 나아가 아픔을 보듬어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픔을 안고 흐르는 시간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실내에서 단순히 빈 공간을 채워가는 그림은 사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자가 아닌 이상 무에서 유를 뚝딱 만들어 버리는 재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네모난 캔버스는 일상에서 얻은 발견을 담는 그릇이어야 합니다. 빛과 어둠이 서로 스미고 벗어나듯이 그림 안의 대상들과 관계하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 가는 그림이어야 합니다. 그제야 우리는 일상에 활착 할 수 있습니다. 아픔을 감내할 일상이라는 바탕, 토대, 거점을 얻고 자리 잡게 됩니다. 캔버스를 빈 공간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 받아들여 달라는 박상희의 바람은 김훈이 일관되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꽃은 피고 집니다. 그 안에는 한없이 피어나고 속절없이 지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핀 꽃이 아니라 피어나는 꽃을, 진 꽃이 아니라 스러져가는 꽃을 그릴 수는 없을까요.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이 그림 안에서 벌어질 수 있을까요. 그런 생생한 느낌을 그림에 담을 수 있을까요. 표현할 수 없기에, 말할 수 없기에 우리는 마음에 담고 침묵해야 하는 것인가요. 꽃이라는 하나의 형체에 시간의 흐름을 부여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꽃 옆에 나비를 두면 어떨까요? 꽃과 바라보는 누구를 함께 그리면 어떨까요? 만남은 꽃처럼 피고 집니다. 빛과 어둠은 서로 스미고 서로 벗어납니다. 만남과 헤어짐은 서로 부딪히면서 떨림으로 표현됩니다. 그림에서 서로 스미고 벗어나는 느낌, 떨림의 느낌은 색과 색 사이의 관계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꽃이라는 형체를 버리고, 색과 색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보면, 나와 너 그리고 나와 세계라는 관계가 쉼 없이 상호작용을 합니다. 드디어 그림은 삶이라는 드라마를, 강물 같은 시간의 흐름을 담게 됩니다. <공터에서>를 읽는 내내 그림 앞에 서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차세의 아내 박상희를 통해 붓을 들고 있는 김훈을 만습니다.


삶은 비극입니다. 비극과 손에 손잡고 춤추는 일상을 살아니다. 맨 처음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쉴 새 없이 아가미를 벌컥거리다가 죽고 또 죽어야 하는 것이 우리 삶입니다. 그 반복에서 흘린 피를 딛고서 아가미는 결국 날짐승과 길짐승의 허파라는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여기서 김훈은 다시 묻습니다. 그 차이를 만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선문답을 던지고는 이내 침묵합니다. 마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답은 찾아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붓을 들고 다시 공터에 서야 합니다. 한 생애가 연습으로 끝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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