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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Dec 12. 2020

남방 우편기, 생텍쥐페리

나를 잊지 말라고 할 수 있을까


조종사 자크 베르니스. 그는 사람들의 속 깊은 사연을 담은 우편물을 실어 나른다. 프랑스를 출발한 우편기는 사하라 사막을 지나 칠레의 산티아고까지 날아간다. 우편물은 귀중하다. 나를 잊지 말라는 외침을 담은 사연이기에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
 
조종사는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전근 통보라도 받는 날이면 그날 밤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관계를 정리한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신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하나의 마을이 지나가면 또 다른 마을이 나타난다. 착륙한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만 언젠가 다시 관계는 끊어진다.
 
베르니스는 외로움을 견뎌야 한다. 여독을 풀어 줄 사랑이 필요하다. 객지에서 나눈 사랑은 저 멀리 손에 잡히지 않는 별일뿐이다. 그럴수록 느낌은 오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그 무언가를 찾으러 더 멀리 떠나고 싶다. 도대체 베르니스가 찾는 것이 무엇일까? 베르니스는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두 살 연상의 첫사랑 주느비에브를 기억해 낸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다른 사내들이 결혼식을 올릴 때, 베르니스가 약혼자로 마음에 새겼던 소녀다.
 
주느비에브에게 베르니스는 어느 날 돌아온 탕자다. 사막 이야기를 들려주는 순수한 우정이다. 그녀는 어릴 적에나, 가정을 이룬 지금에나 평화롭고 잘 보호된 공간에 머물고 있다. 어느 날 반란이 일어난다. 다섯 살 아들을 잃은 것이다. 이후 남편과의 관계는 점점 힘들어진다. 주느비에브는 베르니스를 도피처로 삼는다. 그냥 찾아왔다는 인사도 잠깐, 베르니스의 어깨에 기대어 자신을 데리고 떠나 달라는 말을 힘겹게 꺼낸다.
 
조종사는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베르니스는 사랑 앞에서 준비된 조종사는 아니었다. 폭풍우와 모래바람을 견딘 그였지만 그녀와는 비에 젖은 하룻밤을 넘기지 못한다. 주느비에브 역시 자신을 내려놓고 물살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려 하지만 삶은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니다. 지난밤에 묵은 호텔방의 유리창은 사파이어처럼 짙고 깊은 푸른색이었다. 멀리 별나라까지 꿈을 꾸게 한다. 하지만 새벽의 유리창은 더러움을 드러낼 뿐이다. 가난한 베르니스와 풍족하게 살아온 주느비에브는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한다. 그리고 찾을 자신도 없다. 그들만의 새로운 일상을 찾아 떠났지만, 각자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여행자로 전락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다.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저려온다. 베르니스는 '나는 그녀를 사랑했으니까....'라며 기억될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엇을 기억해 달라는 것일까.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달콤했던 사랑의 기억이 아니다. 그가 들려준 사막 이야기도 아니다.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무너져 버린 모습, 바로 베르니스에 비춘 그녀 자신의 모습이다. 도망쳐온 남편에게 돌아가서 다시 이전의 삶을 살아가겠다던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다. 주느비에브는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찾아온 베르니스를 밀쳐내고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다가오고 지나가는 연속의 반복이다. 그것은 잊지못할 새로운 경험이면서 동시에 추억의 페이지를 닮았다. 책을 읽는 내내 조종사로서의 경험담보다는 첫사랑 이야기에 마음이 갔다. 그리고 첫사랑의 기억이 아른거린다. 나를 추억하고 있을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우리의 추억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잊지 못할 기억들이 뇌리를 스친다. 하지만 내가 도착하는 기억의 종착역은 그의 얼굴에 비친 나의 모습이다. 잊지 말아야 할 아픔이기도 하다.
 
주느비에브는 베르니스에게 묻는다. "자크, 우리가 도착할 수 있을까요?" 도착할 수도,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답은 엔진 탓 말고, 비 내리는 밤 탓 말고, '자기의 이유'여야 한다. 나를 잊지 말라는 말은 그때야 절실한 외침이 된다. 그리고 외면받지 않는다. 자기의 이유를 찾아가는 베르니스의 비행은 다시 시작이다. 폭풍우가 내리치는 '야간 비행'을 끝내고 '어린 왕자'를 만나고 있을 그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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