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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Mar 16. 2021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개인화된 능력주의를 넘어 사회적 상호성의 회복으로


4년 전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수십 년 동안 사회에 누적된 각종 불안, 고민, 합당한 불만의 결과였다. 트럼프 정부는 정치는 물론 사회 각 분야에서 격렬한 대립으로 일관했다. 특정 지지층에 대한 호소와 엘리트에 대한 불신에 근거한 포퓰리즘적 저항은 주류 사회와 집권 엘리트에게는 괴로운 진실이었다. 그들은 이민자와 인종, 민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감, 또는 세계화와 기술 변화에 대한 불안을 원인으로 진단했다. 원인이 그렇다면 해결책은 단순하다. 포퓰리즘의 추한 면을 강조해서 시민적 덕성을 깨우고, 세계화와 기술혁신에 적응하도록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해소된다. 하지만 이 해결책은 이미 펼쳐온 정책들이지 않던가? 더군다나 시민들의 울분을 달래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를 키웠다. 뭔가 중요한 진단이 빠져 있다.


사람들은 능력주의를 선호한다. 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믿음은 매력적이다. 하지만 최근 수십 년간 늘어난 불평등은 기회의 균등에 대한 믿음을 걷어차 버렸다. 1940년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거의 전부 (90퍼센트)는 부모보다 많은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1980년대 생은 겨우 절반이 부모보다 많이 벌어들인다. 사회적 상승에 대한 흔한 믿음에 반해, 가난뱅이가 부자 되기도 훨씬 어렵다.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상류층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거의 없다. 사회적 상승에 대한 연구에선 보통 소득 수준을 다섯 단계로 구분한다. 그 가운데 가다 하층에서 태어난 사람은 겨우 4~7퍼센트만 최상위층에 도달한다. 그리고 삼분의 일 정도만이 중간층이나 그 이상까지 간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보다 중국에 더 어울리는 말이 되었다. 이제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 돕는 방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었기 때문이다. 양극화의 극단에서 승자는 마땅히 받을 것을 받는다는 오만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가는 것이 능력주의의 윤리다.


‘성장이 모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공공선(善)’이라는 믿음은 시장 중심적 세계화를 수용했고 경제가 갈수록 금융화되는 경향을 환영했다. 세계 무역과 신기술, 경제의 금융화에서 오는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손해를 보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상하고 있지 않다는 '분배의 정의' 문제만 부각해서 도덕과 정치 문제를 젖혀버리거나 전문가와 기술관료에게 온통 맡겨 버리면 되는 듯 해왔다. 글로벌 아웃소싱으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을 억누르고, 대신 고등교육 이수 기회를 넓혀 기회의 균등을 제공하는 식이었다. 정치를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기술관료적 정치가 이뤄진다. 그것은 실질적인 도덕적 논쟁에 대한 공적 담론을 실종시켰으며, 논란이 있는 이념 문제를 마치 '경제 효율 문제'처럼 전문가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문제인 듯 취급했다. 시장 메커니즘은 무한 경쟁을 부른다. 경쟁 관계에서 함께 가는 연대는 불가능하다. 연대와 도덕적 담론이 사라진 공간에서 능력주의 가치와 행동방식은 자기 세상인 듯 활개를 쳤다.


능력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관념은 서구 문화의 도덕적 직관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기독교 교리를 살펴보면 신은 전능함에도 불구하고 악이 존재한다는 모순을 만난다. 이 난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으로 풀 수 있다.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이 내린 규범을 지키지 않은 인간의 잘못된 선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선에는 상을, 악에는 벌을 준다는 논리에는 신 앞에서라도 인간은 자기가 받을 것을 받으며 따라서 자기 운명에 책임을 지는 인간 중심적 시각이 담겨 있다.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부르는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는 처음에는 부자들이 돈으로 구원을 사는 부패한 능력주의 관행에 대한 반발에서 피어났다. ‘소명으로서의 직업’은 적게 소비하고 많이 저축하는 규제된 접근으로 자본 축적을 이루어냈으며 나아가 자본주의라는 최선의 사회 제도를 가능하게 했다는 지극히 자본주의를 합리화하는 논리다. 신의 은총 앞에서 당연해야 할 겸허함이 스스로의 노력, 즉 능력에 대한 자부심으로 바뀌는 순간들이다.


이후로 능력주의와 타당한 자격에 대한 담론은 공적 담론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어느새 우리 사회의 화두는 부동산, 주식, 아이의 학력이라는 ‘능력주의 광채’를 어떻게 두르느냐가 되었다. 나의 성공은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라고 보는 시각은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을 강조한다. 그 결과로 개인의 책임이 강조되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간다는 공동체 의식은 약화되었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상호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관련 리스크 부담을 정부나 사회가 아닌 개인으로 옮기려는 태도가 만연했다. 그 개인이 열심히 일하고 규칙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자기 재능과 희망이 허용하는 한 사회적 상승을 할 수 있으리라는 허언(虛言)이 위정자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하면 된다'란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개인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 각자가 삶에서 주어진 결과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는 세계화에 뒤처진 저소득 노동계급을 절망에 빠뜨렸다. 사람에게 일이란 경제인 동시에 삶이 담긴 문화다. 그것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방법이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다. 이렇게 정책의 의미와 목표에 대한 민주적 합의는 사라진 시장 주도적 세계화는 지난 40년 동안 계속되며 정치 담론의 장을 공동화했고, 보통 시민들을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포퓰리즘의 반격을 촉발했다.


능력주의는 처음에 매우 고무적인 주장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믿으면 신의 은총을 우리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주장 말이다. 시장 메커니즘과 우리 사회 주류는 여전히 능력주의에 호의적이다. 심지어 절망에 빠진 빈곤 계층도 자신도 언제나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를 좋아한다. 하지만 완벽한 능력주의는 없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겸손해지는 일이다. <힐빌리의 노래>에서 J.D. 밴스는 실리콘밸리에서 자수성가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않았다. 일관되게 자신을 행운아로 말하면서 운이 좋아야만 참담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불평등한 시스템을 직시하게 해 주었다. 마약과 폭력이라는 지옥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할모와 할배, 그리고 주위의 도움 덕분이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만남이라는 상호작용 과정에서 따라오는 것이 성장이다. 그래서 성공과 실패 모두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성공만이 선(善)이다. 개인화된 능력주의를 넘어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상호성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 거대한 성장 담론이 아니라 함께 갈 때 더 멀리 간다는 소박한 가치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사회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길이다. 코로나 시대의 젊은이들은 현재의 행복을 중시한다.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협동보다는 고립을 자발적으로 선택 중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참여와 연대의 모습을 생각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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