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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Apr 19. 2021

프랑켄슈타인(메리 셸리), 대성당(레이먼드 카퍼)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을 넘어 자기 변혁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고 생각나는 대로 ‘그는 인간이다’라고 썼다.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우리 가족이다?’라고 쓰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감히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물음표를 남겨두었다. 그를 가족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프랑켄슈타인>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이 존재한다. 먼저 끝을 모르고 발전하는 과학기술을 빌려 신의 영역까지 넘보는 인류에게 던지는 경고의 목소리가 있다. 발전이 주는 풍요로움 이면에서 자멸하는 인류를 보여주었지만 인류는 이 경고를 상업적으로 활용했다. 프랑켄슈타인은 유명한 괴물 순위 첫 번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여기에 욕망과 결핍이라는 인간 본성과 인간 본성이 낳은 사랑과 파괴의 모습이 교차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은 자신과 주위를 나누고 스스로를 타자화한다. 가족이라는 공감과 지지의 울타리가 없기에 자신이 느끼는 좌절의 감정을 죄다 공포와 분노로 연결 짓는다. 공포와 분노에 짓눌린 괴물의 얼굴은 과연 우리들의 모습과 얼마나 다를까?

<프랑켄슈타인>에서 ‘개체 발생과 생명의 원인’을 발견하고 괴물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서사를 끌어주는 내레이션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굽이치는 서사를 장악하는 목소리는 ‘이름 없는’ 괴물에게서 나온다. 책의 제목에 주인공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저자 메리 셸리는 암묵적으로 괴물에게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허락했다고 볼 수 있다. 최소한 괴물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만은 사실이다. 더 나아가 메리 셸리는 괴물을 ‘추악한 내 자식’이라고 했다. 이는 메리 셸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자신을 낳고 열 하루 만에 유명을 달리한 엄마, 계모의 학대, 지적 열망, 유부남과 벌인 사랑의 도피, 낭만과 가난으로 점철된 도피생활, 사산과 출산까지 열아홉 나이에 삶의 이면을 죄다 알아버린 메리 셸리에게 기쁜 일은 마냥 기쁜 일이 아니었다. 슬픈 일에도 마음껏 슬퍼할 수 없었다. 감정에 젖기에 앞서 그 너머의 일들을 고려해야 했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에 담긴 분노와 절망은 단순히 소설가의 은유라고 하기에는 마지막까지 지독하고 치밀하다. 심오한 감정의 원류를 끝까지 파헤쳐 다시는 절망 앞에 좌절하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읽힌다. <프랑켄슈타인>은 인간 본성의 원류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통속적 ‘괴물’ 이야기라는 피상적 이미지에 머물지 않는다. 프랑켄슈타인을 만나는 수많은 삶의 결과 연결되어 이 순간에도 새로운 층위의 이야기를 꽃피운다.

다르면 틀린 것이 되고, 틀리면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세상이다. 틀린 것은 괴물과 다르지 않다. 그 괴물을 못내 인간이라고 부를 수는 있다. 그것은 관용의 범주다. 하지만 괴물을 내 가족으로, 더 나아가 양면의 동전처럼 내 안의 한 면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신영복 선생님은 자신의 변화를 끌어내지 못하는 관용은 창백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경계하셨다.

‘목공장에서 목공일을 배웠던 때인데, 목수가 땅바닥에 나무 꼬챙이로 아무렇게나 그린 집 그림을 보고 놀랐습니다. 집 그리는 순서 때문이었습니다. 주춧돌부터 그렸습니다. 노인 목수주춧돌부터 시작해서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습니다.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일 하는 사람은 집 그리는 순서와 집 짓는 순서가 같구나. 그런데 책을 통해 생각을 키워온 나는 지붕부터 그리고 있구나.' 내가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은 톨레랑스와 관용을 다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만약 노인 목수의 집 그림을 앞에 두고 내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떨까요? "좋습니다. 당신은 주춧돌부터 그리세요. 나는 지붕부터 그립니다. 우리 서로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합시다." 이것이 톨레랑스의 실상입니다.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승인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근대사회의 최고 수준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어야 합니다.
똘레랑스(관용)는 은폐된 패권 논리입니다. 관용과 똘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두는 것입니다. 타자가 언젠가 동화되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강자의 여유이기도 하지만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탈주와 노마디즘은 아닙니다.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변화를 향한 새로운 시작이어야 합니다. 창백한 관념성을 청산하고 일하는 품성을 키워야 합니다.’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창백한 관용을 베풀면서 정작 자기 주위에는 울타리를 세우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괴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차이를 존중하고 서로 공존하자는 선언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결국 누가 정했는지도 모르고 어디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관습적이고 정형화된 인간 본질에 갇혀서, 현실에서 겉도는 이방인인 우리 자신을 차별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소설에서 괴물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해준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해 2.5미터 거구의 흉찍한 모습에서 자유로웠던 맹인이 유일했다. 비슷하게 창백한 관념성이 시원하게 무너지는 장면이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에 나온다. 하루는 아내의 손님인 맹인 ‘로버트’와 내키지 않는 시간을 보내는 주인공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때마침 TV에 나온 대성당을 설명하게 된다.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자신에게 익숙한 시각적인 요소로 설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말로는 더 이상 설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맹인는 다른 소통 방식을 제안한다. 맹인 상대방의 얼굴을 손으로 만져가며 인식하는 방식과 같다. 펜을 쥔 주인공의 손 위에 맹인의 손을 포개어 눈을 감고 종이 위에 대성당을 따라 그린다. 암흑 속에서 온전히 대성당이 그려진 순간 주인공은 한동안 눈을 뜨지 못한다. 타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의 진실을 온몸으로 이해한 주인공은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라며 감격한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주인공에겐 자신의 몸에 새겨진 창백한 관념성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해체되는 순간이며, 어떻게 해야 서로 건강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지 알게 해 준 이해의 순간이기도 하다. 창백한 관념성이라는 껍데기를 벗지 못한다면 ‘나는 철저히 혼자다.’라는 괴물의 절규는 <프랑켄슈타인>이 세상에 나온 지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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