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윌마 May 16. 2021

달까지 가자, 장류진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오찬호


진짜 원하는 길이 있는 사람은 그 길을 가라. 그런데 자기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사람 많지 않다. 그 정도 확신을 가질 만큼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도 드물고. 확신이 없다면 공부하자. 어느 정도는 세상에 맞춰서 사는 것도 방법이다.’ 학창 시절 우리는 방황했다. 손에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세상을 더 경험하고 싶었다. 방황을 핑계 삼아 어울려 다니며 학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다 못한 선생님께서 속내를 꺼내시며 하신 조언이다.

2021년을 사는 이십 대는 다르다. 자신이 원하는 길이 아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가려한다. 인생 선배들이 보여준 살아남는 길이란 바로 돈이 되는 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한한 변주만큼 다양한 길 중에서 공무원 시험처럼 가장 검증된 방식을 무조건 따라야 했고, 가상화폐 투자처럼 가장 검증이 안 된 길로 내몰렸다. 정당한 대가 없이 열정 페이를 강요받고, 가능성으로 통하던 청년이라는 단어는 되려 상대적 박탈감만 주었다. 자신은 ‘일인(一人) 기업의 오너'이고 ‘잘 팔리는 상품’이 돼야 한다는 통속적인 논리 앞에서 아무런 불만이나 이의제기 없이 자신을 해체하고 상대방이 원하는 능력과 섬기는 심성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이십 대에게 허락된 선택지였다. 자신을 수단의 방편으로 전락시키려는 어둠은 이면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것을 넘어 공공연한 실로 우리 눈 앞에 실재한다.

이렇게 괴물이 된 세상. 이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같은 괴물로 살아가는 것이 답이 아닐까.  취업이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희망은 매 순간 최선을 강요한다. 정해진 길과 높은 문턱 앞에서 스스로 자기 기준을 갖기 어렵다. 자기 기준이 없어 불안한 사람은 언제나 뛰기 마련이다. 그것도 최선을 다한다. 잉여 인력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고 싶을수록 박탈감과 불안감은 짙어진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겨를이 없다. 버티지 못하면 사회에서 무능한 인간으로 낙인찍힐 뿐이다. 공감력이 떨어진 사회에선 다양성을 찾기 힘들다. 다양성이 사라진 사회에서 변화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현재의 틀 안에서 고정관념과 편견은 더욱 공고해지고 주어진 길만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더군다나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사회 비판적인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비판적 목소리 자체가 사라지고 오히려 부당한 사회구조를 유지하는데 일조하는 목소리만 남았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고. 그 차별에 자신이 당하는 것을 인정하기에, 자신이 남을 차별하는 것 역시 정당하다고 믿는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차별은 결국 자기 자신을 차별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학교 서열화도 그렇고, 같은 대학에서 지방캠퍼스 다닌다고 차별하는 게 말이 돼?”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우리 때도 그랬어.”
“그래도 공공연히 떠들진 않았잖아.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한다니 취준생들부터 정규직까지 반대하고.”
“왜? 몇 년씩 어렵게 준비해서 정규직 들어갔는데, 정규직을 넘보는 건 도둑 심보지.”
“취업 경쟁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그렇지. 그런데 같이 일하자는 입장에서 보면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논쟁의 중심으로 삼아야지.”
“이십 대는 다르지. 기회는 평등해야 한다는 시작부터 꼬이는데 결과가 공정해야 한다는 말이 귀에 들어올까?”
“그래도 정규직으로 취업하는 학생 비율은 작잖아. 결국 자신들 일인데…”

시작이 없으니 결과도 없는 것이 대다수 이십 대의 현실이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뎌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비정규직, 학자금 대출 빚, 영혼까지 끌어와도 불가능한 내 집 마련의 꿈. <달까지 가자>에 나오는 세 주인공이 서 있는 지점의 풍경이다. 장류진 작가의 표현처럼 깎이면 깎이는 대로, 그때그때 조금씩 뒤로 비켜서면서, 추락의 시기를 기약 없이 유예하는 불안한 삶이다.


“언니, 그때 기억 나? 언니가 그랬잖아. 우리에겐 이제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코인은 엉뚱한 곳에 난데없이 뚫린 만화 속 포털 같은 거라고. 께름칙해도 있을 때 들어가야 한다고. 이 기묘한 파장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건지, 이 요상한 소리는 대체 왜 나는 건지, 그런 거 계산하고 알아볼 시간이 없다고, 닫히기 전에 얼른 발부터 집어넣으라고. 오직 이것만이, 우리 같은 애들한테 아주 잠깐 우연히 열린 유일한 기회 같은 거라고.”


“나아갈 땐 한 뼘, 뒤로 돌아갈 땐 반 뼘. 이런 식의 박음질이 더는 지겨웠다. 나는 그냥 부스터 같은 걸 달아서 한 번에 치솟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없던 일이었고 상상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기대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가상화폐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길이다. 누가 옳은지 모른다. 비트코인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옳아서 의지할 데 없는 흙수저에게 일상의 토대가 되어 준다면 반가운 일이다. 코인 가격이 롤러코스트를 타는 동안 환희와 절망 사이에는 불안만이 존재한다. 일상의 불안과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 우리가 과정을 거치는 것은 형체가 없는 불안을 줄이기 위함이다. 과정을 거치지 않고 로켓을 타고 한 번에 달까지 가려는 것이 위태롭다는 것은 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여전히 희망하는 수많은 젊음은 오늘도 서러워서 웃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랑켄슈타인(메리 셸리), 대성당(레이먼드 카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