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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Mar 15. 2023

물들다

자신 안으로 물(水)을 들이다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3410


최고의 화가를 꼽으라면 바로 자연이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가을 산을 울긋불긋 물들인다. 자연에는 타의(他意)가 없다. 자연은 붓을 들어 색을 칠하지 않는다. 자연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식은 염(染)이다. 산을 이루는 나무들 각자가 자신의 색을 바꾼 이후에 산은 울긋불긋 물든다. 보리 하나하나가 파랗게 변한 이후에 보리밭은 파랗게 물든다. 자연이 하는 일은 보리밭을 파랗게 물결치도록 바람에게 알리는 것뿐이다. 물들인다는 것은 그 안의 개별적 주체들이 스스로 호응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들다는 자신 안으로 물(水)을 들인다는 뜻이다. 물은 대상을 왜곡하는 색을 씻어내고 본연의 모습으로 생동하게 한다. 마른땅을 적셔 싹을 돋게 한다. 외부 변화에 호응하는 자기 기준이 생기면서 점점 유연해진다. 어느 순간 그 어떤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서면서 비로소 물드는 것이죠. 겉과 속은 하나가 된다. 변화를 강제하는 방식은 물들일 염(染)이 아니라 색칠할 칠(漆)이다. 칠(漆)은 문을 부수고 들어가 나무에게 그 변화를 알려 줄 수는 있어도, 나무 스스로 호응하는 국면에는 이르지 못한다. 겉과 속이 다른 형국이다.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


물들일 염(染)이 들어간 최고의 문장이다. 순신은 저 바다를 적들의 피로 물들이고 싶었다. 그것도 단칼에. 바다를 피로 물들이는 일은 적을 한 놈씩 베고 한 척씩 부수는 일이다. 개별적인 적들을 한 놈씩 베어 그 피로서 물들일 수 있는 것이다. 피 혈(血) 대신 붉을 적(赤)을 붙이는 순간 저 문장은 허망해진다. 순신은 적의를 알 수 없는 적들을 한 칼로 쓸어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설가 김훈은 염(染)을 공(工)에 비유했다. 선혈이 낭자하는 개별적 죽음 앞에 참담한 마음과 그 죽음을 무심하게 각오해야 하는 마음이 순신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부딪혔다. 참담과 각오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수고로움에서 김훈은 공업적 이미지를 떠올린 것이다.


개별적인 적들의 피로 저 바다를 물들이기 위해서 순신에게 필요한 것은 저 산의 나무처럼 스스로 이길 수 있다고 호응하는 병사들이었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야 한다. 개별적인 인간을 물들이고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순신이 직접 붓을 들고 병사들에게 용기를 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순신 역시 자신만을 다스릴 수 있었다. 길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죽어야한다. 순신이 내놓을 수 있는 건 목숨뿐이었다.


염(染)은 전체와 개별을 아우르는 말이다. 전체와 개별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염(染)은 칠(漆)로 변한다. 순신에게 임진년 전쟁은 개별의 나무들은 보지 않고 산만 이야기하는 임금과 벌이는 전쟁이었고, 결국 벨 수밖에 없는 개별의 울음 앞에서 무너질 수 없는 자신과 벌이는 전쟁이었다. 순신에게 남은 유일한 방편은 염(染)이었다. 순신의 칼은 전체와 개별을 모두 겨누는 칼이었다.


염(染)은 사람 관계에도 유효하다. 사람을 설득할 때 마음을 얻는 것이 먼저다. 서로 간의 맥락이 이어져 소통하는 통로가 생긴 이후에 설득이 가능하다. 부자지간도 마찬가지다. 엄부(嚴父)란 규율을 정해 자식에게 엄격히 지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행동에 엄격한 기준이 있는 것을 말한다. 순신의 자기희생이 병사들을 용기로 물들게 했듯이 아버지가 추상(秋霜)처럼 자기 자신을 대한다면 자식은 물들어 따를 것이다.


염(染)은 자연의 동작원리지만 물들이는 가치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람의 의지에 따라 오염(汚染)도 되고 청염(淸染)도 된다. 물든다는 것은 메마른 마음을 적시고 왜곡된 색을 지워서 나의 본성과 나의 기준으로 변화를 시작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 들어온다. 앞으로는 노 젓지 말고 물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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