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윌마 Mar 22. 2023

미래를 아는 사람은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미래는 지나온 길에서 찾을 수 있는 정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1915

나혜석 자화상, 1928, 수원시립미술관

나혜석 거리는 말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한동안 말하지 못한 사람들이죠. 정리되지 않은 감정에 정리되지 않을 감정이 더해지면 정리된 감정마저 취한 듯 휘청거립니다. 그쯤 되면 이 밤의 끝은 요원합니다. 거리는 아무 말 없이 우리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말하고 싶은 욕구가 바닥나고 이젠 주위가 눈에 들어올 때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을 만납니다. 나혜석은 여성의 신분이 낮았던 시대에 다른 사람보다 앞선 삶을 살았던 신여성입니다. 선구적인 삶,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경험하는 드라마 같은 삶입니다.


나혜석은 신랑과 세계 여행 도중 파리에 체류할 때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신(新) 문명을 몸소 느끼고 새로운 도전 의식으로 불타오를 시점에 그렸다고 보기에 전체적으로 우울합니다. 어두운 배경에 의해 더욱 도드라진 얼굴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폭우처럼 말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입을 다문 나혜석은 묘한 불안감을 느끼게 합니다.


보통 사람은 사건을 순서대로 경험합니다. 원인과 결과로 사건 사이의 관계를 지각합니다. 동일한 조건이라면 동일한 현상이 발생할 거라고 기대합니다. 주어진 현실에 기반을 둔 인과론적 삶에 익숙합니다. 설사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어도 인과적 연관 관계가 밝혀져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이해되어야 하는데 나혜석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나혜석은 여성이라는 신분이 제한된 현실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과거의 관습을 답습하는 미래를 거부합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래서 미래에서 가져온듯한 말로 저항합니다. 나혜석은 소설 『경희』에서 조혼을 강요하는 무서운 아버지에게 떨리는 입술로 “남편이 벌어다 준 밥을 그대로 얻어먹고 있는 것은 우리 집 개나 다를 바 없지요!”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딸, 남편의 아내라는 인형은 나혜석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근대의식의 아이콘이었던 나혜석이 자화상에서는 망연자실한 시선과 다문 입술로 자신을 그렸습니다. 삶에 담긴 밝음과 어둠, 희망과 좌절 같은 내면의 갈등에서 균형을 잃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미래를 아는 사람은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듯 세월 전체를 동시에 지각한 사람은 세월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죠.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미래가 오도록 현재 서 있는 여기에 행하는 것입니다. 시공간의 제한을 뛰어넘어 삶의 목적을 생각하게 합니다. 나혜석에게 여성은 남성과 똑같이 평등한 인간이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세상이 이상한 것이지 자신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꿈꾸는 미래 뒷면에는 혼자 감내해야 할 고독과 좌절이 숨겨져 있습니다. 나혜석은 미래를 아는 경험에서 자신이 감내해야 할 삶의 무게까지 동시에 느꼈을 겁니다. 나혜석의 일상은 혼돈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일상에서는 사치라며 묻어 두었던 감정들이 굴레에서 벗어난 파리에서 자연스레 드러난 것이죠.


나혜석은 파리에서 사귄 최린과 만남으로 인해 이혼을 당합니다. 세상으로부터 패륜을 저지른 여인으로 낙인찍히죠. 아이들과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 더한 아픔은 없습니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나혜석은 한 치 양보 없이 신여성의 진취적인 모습을 잃지 않습니다.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은 주체적 인간이라는 근원적 목적을 지각하고 자신의 삶을 바칩니다. 나혜석 거리에 서면 평등한 세상을 살아낸 나혜석을 만납니다. 이상한 것은 세상이지 자신이 아니라고 저항하는 나혜석을 만납니다. 저항한 크기만큼 내면에 쌓였을 좌절과 그리움을 만납니다.


나혜석은 거리의 낯선 시선을 눈치 챘는지 망연자실한 표정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나혜석의 시선은 차별을 뜻하는 벽 조형물 '잠들지 않는 길'을 향합니다. 화구를 담은 가방을 두 손으로 끌며 한참을 걸어가더니 우리를 돌아봅니다. 굳게 다문 침묵은 이제 보니 희망을 노래하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우리가 쏟아낸 말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동안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면 이야기한다고 우연히 이루어지는 기적은 없었습니다. 미래를 아는 사람은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미래는 지나온 길에서 찾을 수 있는 정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물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