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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Apr 12. 2023

절망을 딛지 않고 세울 수 있는 깨우침은 없다

물 들어온다. 이제 노 젓지 말고 물들어보자.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5230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1970


자연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식은 물들일 염(染)이다. 염(染)은 만남이며, 만남은 충격을 동반한다. 충격은 자국을 남긴다. 자국은 염(染)이 동작하는 원리가 자연에 드러난 형식이다. 자신의 틀을 깨고 변화에 호응하는 수고스러운 과정이 드러낸 실재(實在)다. 비는 땅에 자국을 남기지만, 우리는 올라오는 흙내에서 메마른 땅에 온몸을 부딪쳐 땅을 적시는 비의 수고로움을 맡지 못한다. 새싹은 온 세상을 자국으로 물들이지만, 싱그러운 봄에서 겨우내 얼었던 대지를 비집고 올라온 새싹의 수고로움을 보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염(染)은 수고롭기 때문이다.


김환기는 질긴 화가다. 수고로운 염(染)을 마다하지 않았다. 김환기는 전통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국의 근대 모더니즘을 이끌었다. 한국 추상회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김환기는 젊은 시절 산과 달, 학, 매화, 백자 같은 일상적 소재를 그림에 담았다. 형태가 명확했던 구상은 점차 핵심적인 형태로 단순화되었다. 김환기는 뉴욕으로 건너가 넓은 세상에 한국적 추상을 증명하고 싶었다. 성과를 내기 전까지 한국과 소식을 끊었다. 오로지 점(點)만 찍었다.


일상에서 만나는 추상의 정점은 점이다. 점은 위치는 있지만 부피나 크기가 없다. 선을 나누고 나누어 무한히 작아져서, 끊임없이 무(無)로 수렴하는 과정이 바로 점이다. 점은 형체가 없는 그릇이기에 보편적이고, 무한을 담아낼 수 있어 개별적이다. 점인가. 선인가. 김환기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와 개별적 다름을 동시에 담을 수 있는 기호로 점을 택했다. 점은 숙명이었다.


점은 하나에 집중하지만 결코 하나를 겨누지 않는다. 점은 그 자체로 마침표를 찍은 완성이 아니다. 점은 하나의 점이면서 동시에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점은 그 안에 온전한 이야기를 품은 소우주이기 때문이다. 점을 통해 개별과 전체는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안과 밖으로 확장한다. 점이라는 발자국이 이어지면 선이 된다. 선은 사람이 걸어온 인생이다. 점점이 선으로 이어진 화면은 인간의 시간(人生)이면서 동시에 우주의 시간이다.


김환기는 마음이 약한 예술가였다. 누구보다도 고국을 그리워했다. 김환기는 좌표 없이 떠오르는 오만 가지 그리움을 생각하며 점을 찍었다. 그 점이 애달픈 심상의 표현이더라도 그 수고로움은 달라지지 않는다. 새싹에게 얼어붙은 땅 속 어둠은 한 줄기 빛도 찾을 수 없는 절망의 길이다. 끝없는 패배를 끌어안고 질기게 바동거려야 한다. 타의(他意)가 없는 자연은 모르겠지만,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는 절망이다. 김환기가 지천명에 시작한 뉴욕 생활은 험난했다. 뉴욕은 치열한 생존 경쟁이 벌어지는 전쟁터였다. 뉴욕에서 김환기는 가난했고 외로웠고 그리웠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시류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당시 뉴욕은 인간의 주체적 의지를 넘어 기계문명 그 자체를 강화하는 메커니즘의 세계였다.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자연은 찾기 어려웠기에 형상을 재생하는 색칠은 더 이상 무의미했다. 그것은 오염(汚染)에 힘을 보태는 일이었다. 김환기는 거대한 메커니즘 속에 인간을 가두는 회화를 멀리했다.


김환기의 화면은 규칙적이고 균등한 점을 반복한다. 반복은 화면에 리듬감을 살려 자연이 자신의 소리를 찾고 공간을 형성해서 울림으로 확산하게 한다. 칠(漆)하는 점으로는 무한한 과정과 가능성으로의 자연을 드러내기 어렵다. 수고로운 염(染)이어야 했다. 김환기가 염(染)으로 수렴하는 과정은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는 시간이었다. 이미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하여 원숙기에 접어든 화가에게 새로운 전환은 혼돈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일이었다.


절망을 딛지 않고 세울 수 있는 깨우침은 없다. 절망을 절망으로 끝낼 수 없기에 우리는 어제의 절망 옆에 오늘의 절망을 세우고 다시 절망하는 힘으로 내일의 절망을 만나야 한다. 김환기의 염(染)들은 과정의 수고로움을 외면하고 단번에 현실과 동떨어진 높이로 비약하려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작은 몸짓이다. 그 수많은 염(染) 중에서 깨달음 하나 만날 수 있다면 김환기의 질긴 수고로움은 결코 절망일 수 없다. 김환기가 좀처럼 염(染)을 멈추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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