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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Apr 27. 2023

건강한 공격성, 인문학으로 키우자

사람을 살게 하는 인문학, 누구나 누려야 한다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7885


저마다 인문학 붐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손가락 터치 한 번으로 인문학을 찾아간다. 소식이 닿지 않는 곳에서 외롭게 사는 사회적 약자들이 있다. 정말로 인문학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과 대전노숙인종합지원센터는 노숙시민을 대상으로 매달 인문학 강의를 진행 중이다. 노숙시민은 5년째 이 강의를 이끌어온 책고집 최준영 대표가 쓰는 용어다. 노숙인도, 노숙자도 아닌 노숙시민이다. 나는 ‘그림과 나’를 주제로 노숙시민 앞에 섰다.


노숙시민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들이 여기에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앳된 얼굴의 청년 노숙시민이 눈에 들어오면서 호기심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궁금해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꿨다. 사정을 알고 나서 그 이유를 이들에서 찾을까 두려워서였다. 그동안 경험을 되짚어 보면 그 이유는 대부분 우리 사회가 가진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했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어려운 사람들끼리 부대끼면서 싸우는 게 현실이다. 내가 집중할 일은 강의에서 노숙시민들이 체험할 경험과 그 경험이 어떤 의미일지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면 그건 사건이 된다. 사건은 예측하기 어렵고 충격적이다. 사건 앞에서 우리는 자초지종을 살피고 어떤 인과 관계를 거쳐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 밝히려고 한다.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놀란 상태에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는다. 충격은 다시 어떤 설명을 통해 이해가 되는 일로 정리가 되어야 한다. 과학적 인과 관계라 할지라도 세상일을 완벽하게 원인과 결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내가 찾을 수 있는 원인은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부분적이다. 삶을 통째로 바꾼 사건에 대해 충분히 이해를 하고 다시 안정된 정서를 유지하는 일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해가 되어야 자기 수용이 된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균형은 깨지고 삶은 파편화된다.


주위에서 공격적이고 충동적인 아이를 간혹 접한다. 사랑과 관심에 전문적인 치료를 보태면 아이는 훨씬 밝은 모습을 찾게 된다. 여기서 치료란 공격적인 아이를 얌전하고 순종적인 아이로 바꾸는 개념이 아니다. 건강한 공격성, 즉 외부 자극에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힘을 키우면서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아이로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시끄러운 스마트폰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영상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서 받아들이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다. 만약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처음부터 완성까지 자기 주도로 경험한다면, 아이는 한 바퀴를 돌아본 것만으로 자신이 수용되었다는 생각을 갖는다. 수용받는다고 생각하면 아이는 타협과 양보를 생각할 마음에 공간이 생긴다. 트랙은 몇 바퀴를 돌아야 비로소 원인지 타원인지 알 수 있듯, 아이는 반복적으로 과정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조절의 힘을 키우게 된다.


노숙시민들에게서 몇 가지 질문을 받았다. 질문의 대부분은 강사가 분위기를 환기시킬 목적으로 던지는 물음에 답을 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스스로 궁금해서 나온 질문은 거의 유일했다. 청년 노숙시민이 던진 질문이었다. “처음에는 항아리, 산, 달이었는데 점점 단순화되면서 마지막엔 저렇게 점이 되는 거네요? 와!” 한 추상화가의 작품 양식이 변하면서 점으로 수렴하는 과정을 청년은 온전히 이해한 것이다. 청년은 지금껏 많은 트랙을 돌았을 것이고,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트랙을 돌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중에 한 바퀴를 우리가 이곳에서 함께 했다는 것이다.


내 강의로 대미를 장식했다 생각했는데, 노숙시민들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맞춤형 프로그램으로 운영되기에 매주 모이는 장소가 달라진다. 다음 주에 만날 시간과 장소를 확인하는 것으로 방점을 찍었다. 가로로 선을 쭉 그으면 선의 끝은 위로 아래로 흘러가면서 가늠하기 어렵다. 시작점을 찍고 멀리 끝점을 찍은 후에 선을 그으면 선은 흔들리지만 끝점에 수렴한다. 다음 주에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일은 어찌 보면 멀리 점을 하나 찍는 일이다. 나는 믿는다. 언젠가는 다음 주를 넘어 일 년 뒤, 십 년 뒤를 기약하는 점을 스스로 찍을 날이 오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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