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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May 11. 2023

최고의 완성은 미완성이다

모나리자, '나'이면서 또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시간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0100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중에는 완성된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주문을 받았어도 작품의 완성 여부는 레오나르도 자신에게 달렸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작품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내놓지 않았다. ‘모나리자’ 역시 밀라노와 로마 그리고 인생을 마감한 프랑스로 그림을 들고 다니며 조금씩 다듬었다. 미완의 작품 앞에서 팔짱을 낀 채로 하루 종일 사색하는 일이 더 많았던 것이다.


우리가 형태를 잡을 때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점과 선은 사실 수학적 개념이다. 자연은 수학을 모른다. 자연에는 정확한 점과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한 윤곽선으로 사물의 경계를 짓는 순간 사물은 박제화 되어 굳은 듯 딱딱하고 어색해진다. 레오나르도는 윤곽선이 분명한 선배들의 그림을 보면서 확신했다. “사물의 윤곽선은 선으로 그리면 안 된다!” 자연은 사물의 형태를 빛과 어둠으로 표현한다. 형태는 어둠에 묻히면 사라졌다가 빛을 얻으면 드러난다. 빛과 어둠은 서로 스며들면서 사물의 형태에 무한한 변주를 부여한다.


선으로 윤곽선을 그리면 그 어떤 어둠도 사물을 숨겨서 보듬어주지 못한다. 수용받지 못한 존재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보이는 세계는 손에 잡히지 않는 속성을 지녔고, 인식의 불확실성을 인정할 때 보이지 않는 세계는 실체를 드러낸다.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윤곽을 확실하게 그리지 않고 형태를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듯 희미하게 만들어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는 레오나르도의 발명품”이라고 극찬했던 회화 기법 '스푸마토(sfumato)'는 어쩌면 밝음과 어둠 사이의 변주만큼이나 다양한 인간의 감정과 대자연 앞에서 레오나르도가 취했던 겸손의 방편이었다. 스푸마토는 손가락으로 문질러 안개처럼 흐릿하게 표현해서 그림자와 깊이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호탕한 웃음은 날개 달린 듯 하늘로 비상한다. 안쓰러운 한숨은 땅이 꺼질 듯 바닥을 내리친다. 웃음과 한숨은 정해진 방향과 동력으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안다. 웃음과 한숨은 쉽게 드러나고 쉽게 포착된다. 미소는 눈과 입으로 표현된다. 과하면 가벼워 보이고, 부족하면 어둡다. 살짝 웃자니 눈꼬리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전면 근육이 미세하게 떨린다. 차라리 크게 짓는 표정이 편하지 미세한 떨림을 한동안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이 가득 찬 그릇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이동하려면 큰 힘이 아니라 미세한 떨림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소는 떨림이다. 높고 낮음이 끊임없이 교차해야 떨림이 된다. 나비의 날갯짓보다 가벼운 미소의 떨림은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포착할 수 없다. 정해진 무엇이 아니라 떨림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감을 잡을 수 없는 것이 미소다.


그림은 자신만의 진실을 담는 것이다. 그 진실에 관객의 마음이 움직인다면 보편성을 얻어 명화로 거듭난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보편성은 이론과 경험을 근거로 정당성을 얻는 과정을 거쳐 인류의 본성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의 인권과 평등이 보편적 지위를 얻기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보편적 진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에 따라 도전을 받으면서 인류의 집단적 의식 속에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모나리자’의 미소가 획득한 보편성은 어떤 점에서 개별적 인간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사람들은 ‘모나리자’의 미소에 가장 신비롭고 매력적이라는 지위를 부여했을까?


알듯 모를 듯 미소를 담아내는 일은 입 꼬리 선 하나를 살짝 올린다고 되지 않는다. 희미한 미소 이면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근육과 신경의 움직임, 그 움직임에서 비롯된 떨림이 일으키는 부피감, 그 부피감을 드러내는 빛과 색의 상호작용이 그림 안에서 살아 숨 쉬어야 한다. 레오나르도는 어두운 영안실에서 시체의 피부를 벗겨 그 안의 근육과 신경을 관찰하며 밤을 보냈다. 물 소용돌이나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을 관찰하면서 기하학을 시각적 그림으로 풀어내려 했고, 자연의 패턴에 담긴 형태 변화를 이해했다. 포착하기 힘든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다양한 각도에서 들어오는 빛의 상호작용과 이에 따라 부드럽게 전환되는 색의 변화를 관찰했다. 시선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모나리자’의 미소는 해부학, 빛과 광학 그리고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 무한한 변주를 표현한 손끝에서 시작됐다.


레오나르도의 다른 그림 ‘최후의 만찬’에는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는 예수의 말이 있은 직후의 제자들의 반응이 담겼다. “나는 아니지요?”라고 반문하는 열 두 제자의 동작을 보면 마치 영혼을 실은 감정의 파문이 예수를 향해 밀려오는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감정의 표현에 능통한 레오나르도는 리자 부인에게서 느낀 다양한 감정의 지문을 캔버스에 담아 완성이라는 말로 포장해서 의뢰인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 이 그림을 보관하면서 반복해서 고치고 다듬었다.


의뢰받은 초상화 한 점에 레오나르도가 이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 화가 앞에 앉아 본 사람이라면 그 잠깐의 순간이 낯선 경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시간만큼은 들고나는 숨에서 비롯되는 온전한 나의 감각과 보이지 않는 근육들의 떨림까지, 평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나'이면서 또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시간이다. 복잡한 일련의 심리적 반응은 자연스럽게 표정으로 드러난다. 드러난 표정과 몸짓은 앞에 있는 화가에게도 전달된다. 표정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담아낸 그림이라면 그 초상화는 살아 있는 그림일 것이다.


리자 부인은 손만 내밀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부드럽게 전해오는 숨결에서 레오나르도는 그녀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분명한 선으로 그리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다. 그렇게 그린다 한들 누구 하나 레오나르도를 향한 찬탄과 존경을 거둘 리 만무했다. 레오나르도의 손끝은 생각이 달랐다. 손끝은 이미 그녀의 눈과 입의 꼬리를 흐릿하게 문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숨결은 레오나르도를 향한 게 아니었다. 그녀의 숨결은 자신 안으로 수렴하여 자신만의 우주와 만나고 있었다. 그 만남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감정의 파문은 레오나르도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겉에 드러난 모습만으로 사람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게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신가의 깨달음이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닮았다. 그래서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묘사하고 자연을 닮은 인간의 본성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읽어야 한다.


레오나르도의 삶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려는 지적 탐구의 연속이었다. 레오나르도에게 마침표는 없었다. 처음처럼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었다. ‘모나리자’가 미완성의 완성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최고의 완성은 미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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