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기, 그 스무 번째 이야기
리스본에서 기차로 40여분 거리에 위치한 신트라는 그야말로 포르투갈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옛 왕궁, 신트라 성과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 세력이 건설한 무어인의 성,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모티브로 알려진 페냐 성 등 도시 곳곳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엄청난 건축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과 건축물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 신트라는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호시우 역에서 신트라 행 기차를 타기 전, 신트라 패스를 구입했다. 단돈 15.5유로에 리스본-신트라 간 열차는 물론, 신트라 내에서 열차나 버스를 하룻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이다. 매표소에서 신트라 데일리 패스를 달라고 하면 되는데, 역무원에 따라서는 단위가 큰 지폐를 받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미리 20유로짜리 지폐를 준비해 두자.
리스본에서 신트라로 가는 기차는 거의 30분에 한 대 꼴로 있기 때문에, 열차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일정을 짤 수 있다. 오전 9시 정도 기차를 타고 신트라로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는 리스본을 떠나, 절벽마을 - 무어인의 성- 페냐 성에 이어 호카 곶까지 보고 오는 다소 빡빡한 일정이라, 오전 7시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밤새 야간열차에서 잠을 설친 데다, 새벽부터 멘붕에 빠져 리스본 밤거리를 왔다갔다 했던 터라 몸이 많이 피곤했나보다. 기차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세상 모르게 곯아 떨어져 버렸다. 다행스럽게도 내려야 할 역에 거의 도착했을 때 쯤, 검표원이 표를 확인한다며, 깨워준 덕분에 목적지에 무사히 잘 도착할 수 있었다. 참고로, 절벽마을로 알려진 아제나스 두 마르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신트라 바로 전 역인 '포테라 드 신트라'에서 내려야 한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중, 간이 매점에서 주문한 에스프레소와 에그타르트. 다들 아시다시피, 에그타르트는 이 곳 포르투갈이 원조다. 그래서인지 간이 매점에서 파는 족보도 없는 싸구려였지만, 이 에그타르트 역시 맛이 예사롭지 않았다. 겉은 바삭, 고소하고 안은 달콤, 부드러운 이 에그타르트에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곁들인 가격은 단돈 1.6유로. 아무리 바빠도 꼭 먹고 가야 할 이유다.
포테라 드 신트라 역에서 441번 버스를 타면 아제나스 두 마르로 한 번에 갈 수 있다. 아제나스 두 마르로 가는 버스가 많지 않고 배차간격이 상당히 넓기 때문에, 계획을 잘 세우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쉽상이다. 출발하기 전, 돌아오는 버스 시간표와 정류장을 반드시 미리 확인해 두자.
오전 8시가 채 되지 않은시각, 교복을 입은 학생들 무리에 껴서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좁지만 곧게 뻗은 도로를 가로질러 한참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해가 뜰 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은데, 날이 어둑어둑한 느낌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으로 잔뜩 뒤덮여있었다. 왠지 모르게 점점 불안해졌다..
드디어 포르투갈의 산토리니, 대서양에 맞닿아 있는 절벽마을, 아제나스 두 마르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는 아니었지만, 마을의 한 레스토랑 앞에 세워져 있는 표지판을 보면서, '드디어 이 곳에 도착했구나!' 하는 성취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작은 시골 마을의 버스 정류장을 연상케 하는 아조네스 두 마르의 정류장 벽면에는 마을의 전경을 담은 아줄레주가 그려져 있었다. 동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이 아름다운 광경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니,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야말로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 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날씨가 나를 이렇게 안 도와줄 수가 있을까?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봐도 눈 앞에는 안개가 자욱할 뿐이었다. '아!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던 것일까?' 하늘도 나를 버렸나 보다.
허탈함에 빠져,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야속한 마음에 하늘을 바라봐도 도무지 날씨가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았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구름 사이로, 태양이 살짝 고개를 내밀며 내게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거기, 자네! 비가 안오는걸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라규!!'
'그래 비가 안오는게 어디냐, 좋게 생각해야지!' 하며 마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름 유명한 관광지일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이 곳은 그냥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관광객이 나 말고는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시끌벅적한 관광지와는 달리, 아기자기하고 평화로운 유럽의 시골 마을길을 걷는 것도 나름 묘한 매력이 있었다.
멀리서 마을을 내려다보았을 때에는 지붕들이 모두 벽돌색을 띄고 있었는데, 이 집 주인은 벽돌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가보다. 인부 두명이 위로 올라가 지붕을 온통 하얀색으로 다시 칠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정신병원의 분위기가 풍기는 것은 그냥 기분 탓이겠지?
포르투갈에서 아줄레주는 정말 폭넓게 활용되고 있었다. 포르투에서 본 것 처럼 성당을 비롯한 건물 외벽을 장식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하고, 일종의 미술품의 개념으로 실내에 그려넣기도 한다. 그리고 위의 사진에서처럼 가정집의 문패로도 널리 사용된다. 아마도 이건 '개조심'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골목길을 따라 마을 언덕에 올라 바다 반대편 육지 쪽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여행 가이드 책에는 실리지 않은 새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걷고 싶었지만,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를 차들이 쌩쌩 지나다니는 것을 보고, 조금 위험할 것 같아서 골목길을 되돌아 마을 어귀로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약 한 시간 가량 산책을 하며, 마을 이곳 저곳을 구경하고 나니, 갑자기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정수리가 조금씩 따가워, 아니 뜨거워지는 느낌이랄까? 하늘을 가득 뒤덮었던 시커먼 구름이 조금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니,
신트라의 절벽마을이 아까보다 훨씬 화사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0분만, 20분만 하며, 날이 개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동쪽 하늘부터 서서히 하늘이 거짓말처럼 개기 시작했다. '아!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느덧, 마을 위쪽으로는 푸른 하늘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닷가 쪽은 아직도 구름이 자욱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훨씬 상황이 좋아졌다.
1~2시간 정도 기다려 보면, 정말 완벽한 풍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겠다 싶었지만, 무어인의 성과 페냐 성 등 오후 일정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기에 마냥 이 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만은 없었다. 게다가 앞서도 설명했듯이 버스를 한 번 놓치면,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아쉬움은 마음 한 켠에 접어두고, 정류장으로 돌아와 신트라로 돌아가는 441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날씨가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마음 졸이며 햇살을 기다리는 재미가 있었고, 어쨌든 맑은 하늘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기에 만족스러웠던 시간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절벽마을의 아름다운 모습보다도 매 분, 매 초 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날씨가 좋아지기만을 기다리며 마음 졸였던 그 기분이 먼저 떠오른다. 벌써, 4개월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자, 그럼 이제 무어인의 성으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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