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기, 그 스물세 번째 이야기
시간이라는게 참 묘하다. 똑같은 한 시간도 어떤 때는 순식간에 지나자는 반면, 또 어떤 때에는 느릿느릿 길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신트라를 여행했던 그 날의 한 시간은 정말이지 날아가는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덧 시간이 흘러, 신트라에서의 추억을 돌이켜 보니, 그 날의 하루는 정말 길었던 것 같다. 매 순간 순간을 치열하게, 일분 일초를 허투루 쓰지 않으려 노력하다 보니, 한 달여의 유럽여행 중 가장 많은 곳을 가고, 많을 것을 보면서 알차게 보낸 하우렸다. 당장 블로그만 봐도 그날에 대한 포스팅이 벌써 4개째 진행 중이다. 5분 단위로 시간을 확인하며, 바쁘게 고생하며 보냈던 시간을 보상받는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 ㅋ
이번 여행에서 가장 바쁘게 보냈던 그 날, 아조네스 두마르에서 무어인의 성을 거쳐 페냐 성까지, 숨가쁜 일정을 소화하고 마지막 목적지인 호카 곶으로 향했다. 신트라에서 버스로 약 한 시간,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내달리는 버스 안에서 포르투갈 버스 기사 아저씨의 운전 솜씨에 새삼 감탄했다. 입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아찔한 기분을 느끼긴 했지만 말이다.
이 블로그에 몇 안되는 세로 사진, 호카 곶 기념비의 모습이다. 기념비에는 '이 곳에서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고 적혀 있다는데,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다. 뭐 적혀 있다고들 하니, 그렇겠지... 설마하니, 그 많은 블로그들이 다 거짓말을 할 리는 없지 않은가?
다들 버스에서 내리기가 바쁘게 호카곶 기념비 앞에서 모여 이런저런 포즈를 잡으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는 것이 전부인 우리와는 달리, 유럽 사람들은 사진을 찍을 때마다. 포즈도 다양하고, 표정도 정말 자연스러웠다. '다들, 어디 학원이라도 다니나?' 싶을 정도로...
아무튼 혼자 여행을 할 때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닐 때를 놓치지 않고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기념비 앞에서 찍은 사진을 하나 정도 올리고 싶지만, 세찬 바람 탓에 모자가 날아갈까 신경쓰느라 제대로 된 사진을 건질 수가 없었다.
기념비에서 시선을 왼쪽으로 살짝 돌리면, 그림같은 해안 언덕과 대서양이 눈에 들어온다.
해안선을 따라 나 있는 산책로를 걷자, 그야말로 그림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전에 절벽마을에서 보았던 장면이 묘하게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산책로를 따라 바닷가 쪽으로 길게 이어진 난간에 기대어 한참동안이나 아름다운 경치와 파도 소리를 감상했던 것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한참을 기대고 있었던 그 난간은 어느 날 관광객 부부가 셀카를 찍다가 이곳에서 절벽아래로 떨어져 죽는 사고가 일어난 후 설치된 것이라고 한다. 산책로 폭이 그리 좁은 편이 아닌데, 어쩌다 사고가 난 것인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사고 소식이지만,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저 멀리, 등대를 배경으로 세워져 있는 이 비석의 정체가 무엇일까? 하며, 한참을 고민했지만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검색을 해 보니, 글로벌 봉사 단체 중 하나인 로터리 클럽의 창시자인 폴 해리스란 사람에 대한 기념비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나서 다시 보니, 그제서야 아랫쪽에 폴 해리스라는 이름과 함께 로터리 클럽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한다.
아! 그리고 저 뒤에 보이는 등대는 포르투갈 최초의 등대로 1772년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도 밤이 되면 어둠 속에서 묵묵히 바닷길을 밝혀주는 고마운 존재다
지금은 밤마다 등대가 바닷길을 밝히고 있지만,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유럽 사람들은 이 곳을 지구의 서쪽 끝이라고 굳게 믿으며, 바다로 나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다 콜럼버스 이후,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아줄레주에 그려진 배들이 대서양을 넘나기 시작하면서, 리스본과 이 곳 호카곶은 신대륙으로 향하는 전초기지가 되었을 것이다. 갑자기 나의 학창시절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대항해시대와 조안 페레로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어느 덧, 호카 곶 기념비 뒤로, 해가 서서히 넘어가고 있었다. 이 때 시간이 대략 다섯시 반정도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몰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사실, 오전, 오후 일정을 소화할 때만해도 호카 곶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너무 바쁘게 서두른 것인지, 필요 이상으로 일찍 이 곳에 도착해 버렸다. 호카 곶에 도착한 지, 30여분이 지나자 처음의 설레임은 온데간데 없고, 세찬 바람을 맞으며 그저 먼산만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호카 곶에서의 시간이 점점 지겨워지기 시작할 때 쯤, 관광안내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호카 곶에는 바다와 절벽, 기념비가 전부고 그나마도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관광안내소에서 안내받을 만한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 곳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대륙의 끝을 다녀갔다는 인증서 때문이다.
11유로!!
고작 이름 적힌 종이에 도장 하나 찍는 것 치고는 꽤 비싼 가격이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가기 좀 뭐해서 A4 용지보다 약간 큰 크기의 인증서를 손에 넣었다. 이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바닷가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별 고민하지 않고 산 인증서가 여행내내 골치를 썩게할 줄이야... 별 거 아닌 종이쪼가리지만, 혹시나 가방안에서 구겨지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포르투갈을 떠나 모로코를 거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여행을 마치는 마지막 순간까지... 따로 봉투에 넣어 애지중지 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인증서를 손에 꼭 움켜쥐고 관광 사무소에서 몸을 좀 녹이고 나왔더니, 그림자가 한껏 길어져 있었다. 3월의 호카 곶에서는 저녁 6시 반 정도에 해가 바닷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뿐, 6시 버스를 놓치면 꼼짝없이 7시 막차를 타고 돌아와야 한다.
대륙의 서쪽 끝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어떤 느낌일지, 매우 궁금하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한시간을 더!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다음날 오후에는 리스본을 떠나야 했기에, 1분, 1초라도 빨리 돌아가 저녁에 잠깐이라도 시내를 둘러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랜 고민 끝에, 석양을 뒤로 하고 신트라로 돌아가는 6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쉽게도 호카 곶의 일몰을 온전히 느끼지는 못했지만, 호카 곶에서 바라본 석양은 지금까지도 가슴 깊은 곳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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