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기, 그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매번 잠자리가 바뀌어서일까? 아침 잠이 많은 나지만, 여행 중에는 매일같이 아침 이른 시간에 눈이 절로 떠진다. 덕분에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따뜻한 커피와 함께 호스텔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즐기며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내 평생에 포르투갈에서 맞는 마지막 아침일지도 모르는 그날도 역시 그랬다.
아침 일찍 일어나 리빙라운지 호스텔의 자랑, 꿀맛같은 팬케이크를 대여섯장 해치우고 난 후,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나니 어느 덧 시계가 8시 반을 가르키고 있었다. 캐리어에 빠뜨린 것은 없는지 짐을 꼼꼼히 챙기고 숙소에서 공항까지 걸리는 시간과 모로코 행 비행기가 떠나는 시각(오후 1시 반)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호스텔을 나설 수 있었다. 오늘의 목표는 단 하나, '12시 전까지 숙소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렇다 할 계획도 없이 가장 먼저 찾았던 곳은 리스본의 명물 산타주스타 엘리베이터였다. 죽기 전에 반드시 봐야할 1,001대 건축물 중 하나라고 한다. 1,001개라... 이 정도면, '반드시'라기보다는 그냥 '볼려면 보고, 말려면 말아라'가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높이 45m의 산타주스타 엘리베이터는 바이샤 지구에서 바이루 알투 지구로 이동하는 가장 효율적인 대중교통 수단이다. 엘리베이터를 대중교통이라고 부르는 것이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다른 대중교통 수단처럼 이용료(편도 2.8유로, 왕복 5유로)를 교통카드(viva카드)로 결제할 수 있고, 리스보아 원데이 패스 소지자는 무료로 이용할 수도 있다. 실제로 산타주스타 엘리베이터는 언덕이 많은 리스본의 지형적 단점을 극복하고 사람과 물자의 교류를 더욱 활발하게 만들자는 목적으로 1902년 구스타브 에펠의 제자, 라울 메스나에르 드 퐁사르에 의해 건축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뒷쪽으로 바이루 알투 지구로 연결되는 철제 통로도 있다고 하는데, 하필이면 내가 찾았던 기간에는 엘리베이터 보수공사가 한창이라 정작 직접 타고 올라가보지는 못했다. 이렇게나 열심히 조사하고 공부했는데 말이다. ㅠㅠ
아무 생각없이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트램. 화려한 디자인과 길게 쭉 뻗은 바디의 모양새가 어제의 낡은 트램과는 전혀 달랐다. 포르투갈 특유의 노란색 건물과도 제법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작정 사람들을 따라 걷다 도착한 곳은 리스본의 또 다른 명소, 코메르시우 광장이었다. 원래는 마누엘 1세의 궁전이 있던 자리였지만, 1755년 대지진으로 궁전이 싸그리 무너지면서 광장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코메르시우 광장의 역사에 대해서는 여행이 끝나고도 한참 뒤인 지금, 포스팅을 위해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냥 리스본의 수많은 광장 중 하나겠거니 했었다는...
코메르시우 광장은 리스본 시내의 수많은 버스와 트램이 지나다니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리스본을 찾은 관광객이라면 이 곳을 반드시 한 번쯤은 들르게 된다.
코메르시우 광장 옆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큰 강인 테주강이 흐르고 있다. 강의 규모가 얼마나 큰 지, 처음에는 바다인줄 알았다. 눈 앞으로 펼쳐진 드넓은 물줄기를 바라보며, 대항해 시대의 선원들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문득 강 건너편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예수 상을 보고서야 여기가 바다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역시나 나중에 검색해보니, 내가 봤던 것은 강이었고, 오른편으로 보이는 것은 1974년에 있었던 혁명을 기리는 '4월 25일 다리(ponte 25 de Abril)'다. 참고로 4월 25일 다리는 원래 포르투갈의 독재자의 이름을 딴 '살리자르 다리'로 불렸는데, 1974년 4월 25일 혁명 이후, 그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코메르시우 광장을 나서면서, 머리가 조금 복잡해졌다. '대항해시대2'라는 게임에 빠져있던 어린 시절에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리스본이었건만, 내게 남은 시간이 두 시간 남짓이라니... 사실, 대항해시대의 영광을 제대로 느끼려면, 벨렘지구로 가서 제로니모스 수도원이나 발견의 탑, 벨렝 탑 등을 봐야한다. 문제는 숙소에서 벨렘지구까지는 트램으로 왕복 한 시간 거리라는 것. 오랜 고심끝에 벨렘지구를 해체하기로... 아니,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그냥 바이샤 지구 골목길을 정처없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이샤 지구의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조각품. 마치 대항해시대의 영광의 순간을 기록한 것 같았다. 그냥 골목에서 마주친 조각이라 하기에는 꽤 수준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조각이 새겨진 건물은 MUDE(Museu do Design e da Moda)라는 세계적인 디자인 전시관이었다.
이 곳에는 포르투갈 최고의 예술품 수집가 프란치스코 카펠로의 수집품 2,500여점을 전시되어 있다. 2002년 당시 약 660만 유로의 가치를 가진 카펠로의 소장품을 기증받은 리스본 시는 카펠로의 마음이 바뀔까봐 그 길로 당장 울트라마리노 국립은행 건물을 전시관으로 개조했다고 한다. 이런 뒷 이야기를 몰랐던 나는 그냥 담벼락에 있는 배만 카메라에 담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한다.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걷다가, 작은 스쿠터와 차들이 줄지어 서있는 거리에 도착했다. 대충 눈치가 관광객들을 태우로 시내 여기저기를 누비며 설명을 해주는 가이드 상품이 있는 것 같았다. 잘만 하면 짧은 시간 안에 리스본을 알차게 구경할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아쉽게도 스쿠터 주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뭐 오늘은 그냥 무작정 걸어야 할 운명인가보다.
사방의 벽이 온통 그래피티로 뒤덮여 있던 골목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었던 작품. 이번 여행에서 셀 수도 없을만큼 그래피티를 많이 봤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들었고, 기억에 남았다. 미리 충분히 계획을 세우고 정해진 동선에 따라 움직였다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꺼다.
여긴 대충 예술가의 거리 쯤 되는 것 같다. 좁은 골목길, 벽을 따라 배우로 보이는 사람들의 사진과 간단한 설명이 줄지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도 아니고 길거리에 말이다. 하루에도 대여섯번씩 이 길을 지나다니는 동네 주민들이야 신경도 쓰지 않고 골목을 거닐고 있었지만, 내게는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렇게 그 골목을 빠져나오니 골목 어귀에 기타(?)와 함께 뭔가가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멋모르고 찾은 곳이지만, 이 곳 유명한 관광지임이 틀림없다. 근데 왜, 관광객이 나밖에 없었을까? ;;;
어느 덧 시간이 지나 11시가 넘었다. 이제는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 방향을 찾기 위해 일단 큰길로 나와 구글맵을 켜고 위치를 확인했다. 그냥 큰길을 찾아 나온 것 뿐인데, 골목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구글맵이 인도하는 대로 걷다보니, 드디어 호시우 광장에 도착했다. 리스본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곳인데, 내게는 리스본에 도착해서 가장 처음으로, 그리고 떠나면서 가장 마지막으로 들른 곳으로 기억될 것 같다. 뭐 그래봐야 유럽의 흔하디 흔한 광장 중 하나겠지만,
호시우 광장에 소풍나온 것으로 보이는 포르투갈 꼬맹이들의 모습! 아무런 계획없이 시작했던 반나절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던 날이기도 했다. 물론 남들 다 가는 제로니무스 수도원 그림자도 밟아보지 못한 건 매우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남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리스본의 매력을 느꼈다고나 할까? 뭐, 유명한 관광지들이야...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오지 뭐!
그렇게 아쉬움과 만족감을 느끼면서, 포르투갈 여행을 마쳤다. 이제는 두려움과 설렘을 반반씩 안고 모로코로 떠날 시간이다. 과연 모로코에서는 또 어떤 예상치 못한 여행의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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