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기, 그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새벽 6시 30분, 귓가에 울리는 우렁찬 알람소리와 발가락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까끌한 이불의 감촉이 조금은 낯설었다. 여기가 어디지...? 하는 의아함과 함께, '아! 모로코에서의 하루가 꿈이 아니었구나'하는 깨달음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래, 지금은 모로코를 여행 중이다. 그리고 재빨리 일어나 사막투어를 출발해야 한다. 시간이 넉넉치 않음을 느끼고 서둘러 샤워를 한 후, 짐을 챙겨 리아드를 나섰다.
시간에 맞춰 나를 데리러 온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어딘지 모를 공터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사막으로 떠나는 수많은 관광객들과 그들을 실어나를 자동차들로 제법 북적이고 있었다. 간단하게 이름을 확인한 후, 한 무리의 사내들의 안내에 따라 벤에 몸을 실었다. 투어라기보다 인력시장에서 일자리를 배정받아 공사판으로 떠나는 듯한 분위기다. 앞으로 2박 3일동안 나와 함께 할 일행은 독일에서 온 할아버지, 오스트리아에서 온 노부부,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온 사내 둘, 프랑스에서 온 중년 부부 등이다. 멤버의 구성을 보아하니, 그리 활기차거나 재미가 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공사판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듯 하다.
마라케시에서 사하라 사막의 작은 마을 메르주가까지는 무려 620km,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약 1.5배에 달하는 엄청난 거리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아틀란티스 산맥도 넘고, 비포장도로도 달려야 하기에 상당한 체력이 요구되는 여정이다. 말이 사막투어지 사실 2박 3일 일정의 대부분을 봉고차에 앉아 창밖 풍경을 구경하며 보내야 한다. 처음에야 중간중간 쉴때마다 나와서 사진도 찍고 그랬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말수는 줄어들고 표정은 점차 어두워져만 갔다.
아틀란티스 산맥을 넘으며 처음으로 차가 멈췄던 곳에는 모로코 전통 토기를 파는 노점상이 있었다. 모로코 전통음식인 따진과 같은 이름을 가진 고깔 모양의 그릇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잠시 그릇을 구경하다가 문득 떠오른 궁금증 하나! 이 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메르주가 투어를 가는 관광객인데, 과연 장사가 되기는 하는걸까? 심지어 이 곳, 산악도로는 마을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이다.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기도 많이 힘들텐데... 하는 약간은 쓸데없는 걱정이 드는 순간이었다.
차창 밖 풍경이 지루해질만하면 차가 멈춰서고, 그 앞에는 어김없이 무언가를 파는 상점이 있다. 그나마 이 곳은 관광객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곳이다. 달걀만한 돌 안쪽면에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물질(?)이 가득차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할머니가 잔뜩 신난 표정으로 돌멩이를 몇 개 집어들고 돈을 건넨다. 순간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었으나, 이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아직 여행은 많이 남았고, 이런 건 가져가봐야 짐밖에 안된다.
잠깐 졸았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우리를 태운 차는 어느새 이름 모를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마을을 잠시 둘러보다가 오렌지 주스를 한 잔 마셨다. 비포장 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왔던지라 먼지 때문에 목이 조금 칼칼했는데,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니 기분까지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첫날 제마엘프냐 광장에서도 그랬지만, 모로코의 오렌지 주스는 정말이지 예술이다.
어디에서 찍은 사진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마을 어딘가의 건물 벽에 인상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이 곳은 수십년, 아니 수백년 전에는 꽤 번성했던 도시였나보다. 오밀조밀 줄지어있는 건물과 사람들로 가득찬 거리의 분위기를 보니, 나름 상업의 중심지가 아니었을까? 한참동안 그림을 들여다보니, 사람들의 옷차림이 조선시대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이드라도 있었으면 그림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라도 했을텐데... 쩝, 돌이켜보니 뭔가 아쉬웠던 순간이다.
마을을 떠난 차는 또다시 구불구불한 산길로 들어섰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또다시 무언가를 파는 노점 앞에 멈춰섰다. 이번에는 형형색색의 그릇을 팔고 있었다. 나름 아름다운 디자인에 합리적인 가격이지만, 역시나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없다. 일행과 함께 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그릇이 예쁘지 않냐며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 가져가면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것 같긴 해요. 근데 앞으로 보름이 넘게 배낭여행을 해야 하는데, 그 동안 그릇을 깨뜨리지 않고 가져갈 자신이 없네요.' 대답을 들은 아주머니는 빙긋 웃어보였지만, 더 이상 말을 걸지는 않았다.
만약, 저 그릇을 바르셀로나 공항 면세점에서 발견했다면 어땠을까? 장사에 있어서는 무엇을 파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팔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전략이 필요하다. '과연 안전하고 편리하게 집으로 그릇을 가져갈 수 있을까?' 라는 소비자의 의구심이 풀리지 않는다면, 그릇가게 아주머니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빈 손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8개월 전, 모로코 산길에서 만났던 그 아주머니는 지금쯤엔 해답을 찾았을까?
드디어 메르주가 투어의 첫번째 목적지 아이트밴하두(Ait Ben Haddou)에 도착했다. 아틀라스 산맥의 암석사막에 위치한 아이트밴하두는 모로코 전통 부족인 베르베르족이 거주하는 요새도시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작은 강을 사이에 두고 2개의 마을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11세기에 건설된 구 도시에는 10여 가구만이 남았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강 건너 신도시로 이주했다고 한다.
흙으로 만들어진 건물의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사막의 황량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탓에 이 곳 아이트벤하두는 고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촬영지로 인기가 많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글레디에이터와 미이라를 비롯하여 헐리우드 영화 수십편이 이 곳에서 촬영되었다.
차에서 내려 아이트벤하두 투어를 함께할 가이드를 만나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마을로 들어가려면 작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가뭄이라 그런지 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냇물에 가까웠다. 가이드 말로는 사하라 사막이 예전에는 바다였던 탓에 아직까지도 강에 소금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눈앞에 강을 두고도 5km이상 떨어진 곳에서 매일 물을 길어와야 한다고...
모래 주머니로 만들어진 징검다리 앞에는 열 살 전후의 아이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강을 건너기 위해 가이드를 따라 징검다리 쪽으로 가까이 가니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 손을 내민다. 혼자서도 충분히 건널 수 있지만, 뭔가 분위기가 묘하다. 뭔가에 홀린 듯 아이의 손을 잡고 하나 둘, 하나 둘 하며 강을 건너고 나면,
일진 앞의 빵셔틀마냥 지갑을 탈탈 털어 돈을 건넨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하는데, 정말이지 모로코에서는 뭐 하나 공짜가 없다.
이제 저 문(?)을 통과하면 글레디에이터의 마을 아이트벤하두에 입성하게 된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씨에 귀찮기도 하고 일행 중에 어르신들이 많아 괜한 걱정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글레이에이터의 현장에 와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설레기도 했다. 아이트벤하두 투어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확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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