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하루
이상한 병에 걸린 것 같다. 집이 조용한 걸, 아무 소리가 안 들리는 걸, 무언가를 안 보는 걸 못 참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무의식적으로 티브이를 켠다. 아침 시간이라 다들 바빠서 정작 아무도 보질 않는데 티브이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문득 이상하다.
늘 무언가를 보고 있다. 내 머릿속은 흡사 정글 같아서 정리와 침묵이 필요함에도 나는 무언가를 보는 걸 포기하지 못한다. 내 폰에는 웨이브,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까지 깔려있다. 나는 티브이에 연결해서 늘 무언가를 보고 있다. 보는 행위에 중독이 된 듯이.
어느 날 거실에서 스텝퍼를 하면서 티브이를 보다 문득 현타가 왔다. 어떤 예능을 보고 있었는데 그 방송 내용을 보고 생각하고 웃고 즐기는 게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는 걸 나도 모르게 자각한 것이다.
요즘도 그렇게 배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TV는 바보상자”라고 배웠었다. 그땐 그렇게 배우면서도 “왜?”라는 생각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요즘은 이해가 간다. 그것들에 적응이 되고 중독이 되어 가끔씩 뇌가 멈추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요즘 나는 어떤 단어가 갑자기 생각이 잘 안나기도 하고, 생각이 멈춰버린 느낌을 받았다. 원래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내가 더더욱 그렇게 된 느낌. 몸에 녹이 잔뜩 슬어버린 느낌.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IPTV가 고장이 나 있었다. 와이파이도 잡히지 않고, 방송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컴퓨터는 당연히 되지 않았다. 화면에는 그저 신호가 잡히지 않으니 고객센터로 전화하라는 문구뿐.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런지 고객센터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열 번을 넘게 전화해서 연결된 고객센터에는, 동네 전역에서 일어난 일이라 복구중이라고 했지만 정확히 언제 복구가 끝나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야 하지?
아무것도 켜 놓지 않은 우리 집은 정말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아이조차 학교에 가서 아무도 없는 집에 아무 소리도 들르지 않으니 굉장히 어색했다. 오늘따라 아파트 어딘가에서 맨날 하던 그 시끄러운 인테리어 공사조차도 하지 않는다.
이번 통신장애는 지역뉴스에도 조그맣게 났다. 동네 인터넷 선 연결 공사가 잘 못되어 생겼다는 이번 일은, 정전이 된 것처럼 아파트 대부분이 절간처럼 조용해 보였다.
나는 소리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우선 집을 시끄럽게 만들어 보았다. 청소를 부랴부랴 마쳤다. 청소기 소리로 시끄럽던 집이 곧 조용해졌다.
또 어색해졌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나는 화장실이 마려운 강아지처럼 초조하게 하릴없이 집 안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때마침 빌려온 책도 없는데, 도서관에 갈까? 서점은?
일단 이른 점심을 먹자. 나는 밥상을 차려 밥을 먹기 시작했다. 젓가락이 반짝 부딪히는 소리, 밥을 씹는 소리. 이 세상엔 나와 밥그릇 단 둘 뿐인 기분이었다.
산책을 나갔다. 이제는 햇볕에 반사된 등이 제법 뜨겁다. 사람들의 옷차림에는 이미 봄이 와 있었다. 나만 집 같은 겨울에, 겨울 같은 집에 내내 처박혀 있었나 보다.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그냥 신이 났다. 마음속에 새싹이 톡, 하고 자라난 느낌.
공원에는 튤립을 잔뜩 심어놓았는데, 어찌나 환하게 피어있던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봄꽃 구경을 못 갔구나. 바깥은 알록달록 엠엔엠즈 초콜릿처럼 화사하고 저마다의 색깔을 내고 있는데, 문득 나만 갇혀 이 세상의 다양한 것들을 못 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파란 하늘에, 주황빛 분홍빛 튤립들을 보고 있자니 답답했던 두 눈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사람들 없는 공원 구석에 가서 모처럼 커피도 한잔 사서 마셨다. 공기는 모처럼 맑고 달콤하다. 말로 표현하기엔 어렵지만, 비가 올 때 비 냄새가 나는 것처럼 봄이 오면 봄의 특유의 냄새가 있다. 달콤하고 뭔가 부드러운 향. 새싹의 향인 것 같기도 하고 비가 온 직후의 젖은 흙 냄새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마스크 없이 이 냄새를 오롯이 코로 맡은지도 2년이 넘은 것 같다.
시럽이 하나도 들지 않은 커피인데도 맛이 참 달게 느껴졌다. 나는 사람들이 오지 않는 이 공원의 작은 공간에 감사하며 모처럼 천천히 커피의 향과 맛을 음미하며 노을이 예쁘게 들 때까지 그렇게 영원처럼 앉아있었다.
생각해보니 인터넷도 티브이도 없는, 심심하고 뭘 해야 할지 몰랐던 하루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쉬고 머리가 쉬어간, 전혀 심심하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놓치고 사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