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이야기 집합소 1편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이 언제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코로나 역학조사원’으로 일했을 때라고 말하겠다.
가장 힘들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또 가장 애틋한 시간이었다.
나는 수도권에 한 보건소에서 코로나 확진자들의 동선을 추적하는 일을 했었다.
코로나 시기 초반에는 방역물품을 하나하나 역학조사원들이 배달했다.
그때는 확진자들이 짧게 지나간 곳까지 방역물품을 전해줄 때라,
방역물품을 가득 안고 대중교통으로 하나씩 배달했다.
역학조사원들만으로는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경찰, 군인, 시청, 구청 여러 곳에서 지원을 나왔다.
개인적으로 코로나 역학조사원으로 일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직원이 아니면 가볼 수 없는 여러 직장에 가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담당하는 지역 한정이기는 했지만.
자가격리 통보만 해도 한 1,000명 정도는 해보지 않았을까.
자가격리 통보를 할 때마다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았다.
학생들에게는 좋은 추억을 쌓을 기회를 뺏은 것 같았고,
직장인들에게는 안 그래도 힘든 직장생활 눈칫밥 먹게한 것 같았고,
자영업자들에게는 내가 생존권을 앗아가는 것 같았다.
특히 자영업을 해본 경험이 있는 나에게는 자가격리를 한다면
얼마나 손해인지 아니까 말을 꺼내기가 너무 조심스러웠다.
“저 한강물에 번호표 받아놨어요.” 자가격리 통보를 받았던 자영업자 분이 하셨던 말씀이다.
내가 마음대로 자가격리를 풀어드리진 못하는 말단 직원이라 위로라도 했지만,
어쭙잖은 위로가 더 불편하실까봐 위로도 못해드렸다.
삶을 포기하고 싶을만큼 힘들다는 한 마디였다 보니 여전히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음성이었던 분들이 양성으로 바뀌었을 경우.
젊은 분들이나 기저질환이 없는 분들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분들에게 질환이 있는 분들이나 노인분들이 전염되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함이다.
모든 분들이 아시다싶이, 코로나 사망자가 0명은 아니였으니까.
몇몇 분들이 하셨던 말씀이 있다.
“너네들이 이런다고 코로나 막을 수 있냐?”
코로나 역학조사원으로 일했던 분들은 코로나 환자 0명을 만들거나
코로나를 막기 위함이 아니라 추가적인 감염을 막기 위해 일했다.
누구보다도 코로나로 인해 고통받는 분들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주말과 공휴일을 반납해가며 최선을 다했다.
너무 많은 이야기가 나온 곳이다 보니, 앞으로 여러편에 나뉘어 이야기 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