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평생 일기를 잘 안 쓰는 내가 5년 일기장을 산 첫 해에 재규의 투병과 죽음을 쓰게 됐다. 당시에는 멸종 위기의 인간처럼 기록에 매달려 영수증과 약봉지도 붙이고 최대한 세세히 재규의 상태와 나의 감정들을 빠뜨리지 않고 적으려고 했다. 사진과 영상도 틈틈이 남기려고 했었다. 나중에 다 들여다볼 것 같아서, 아쉬움 없이 준비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막상 재규가 가버린 이후 그때의 기록들을 마주하기 버거웠다. 올해 그 날짜의 페이지는 펼치지도 못했다. 재규 아팠을 때 사진들은 쳐다보지 못하겠고 작년에 기록한 8월 중순부터 11월 20일까지의 글자들이 눈에 보여도 읽지 않았다. 점점 더 그런 기록들은 거들떠보기조차 싫고 그냥 건강하고 장난치고 편안했던 사진과 영상들만 들여다보게 된다.
둘.
재규 생각이 때때로 나는데 어떤 때는 눈물이 왁 나고 어떤 때는 안 난다. 웃으면서 눈물이 날 때도 있다. 동생(재규누나)이 최애의 포토카드 만든다기에 나도 재규 포토카드나 만들까 어쩔까 웃으며 수다를 떨다가 아주 잠시 울기도 했다. 이렇게 1년을 보내고 나니 대충 뭉뚱그려놨던 감정들 중에서 그리움을 골라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움은 슬프지만은 않은데 (심지어 반가울 때도 있다) 갑자기 속이 뜨끈해지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증상이 랜덤하게 나타난다. 길게 지속되는 감정류가 아니라 훅 휘감고 가버린다. 세상에서 사라진 것에 대한 감정이라서 그런 것 같다.
셋.
난 글빨도 떨어지고 말빨도 없어서 두어 명의 사람들 앞에서도 얼굴이 빨개 갖고 횡설수설하는 편이다. 마음속의 생각이나 감정은 언어로 옮기는 순간, 순도가 떨어지고 진정성을 잃고 폐기 돼버린다고 믿었다. '느껴야지. 오글거리게 뭘 쓰고 찍어?'라고 생각했는데. 표현을 멀리 하다 보니 얼렁뚱땅 느낌만 스치고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 같다. 나를 더 알려면 내면의 뭔가를 적거나 찍거나 그리거나 표현해야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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