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무언가 그리기
이 석류는 우리집 냉장고 맨 아래 과일칸에서 아무 존재감 없이 2020년 10월 25일께부터 2021년 3월 10일까지 살고 있었다. 오늘은 수요일인데 난 아직도 석류 쥬스를 만들어 먹지 않았다. 이렇게 이 석류는 오래 산다.
'매일 무언가 그리기'가 쉽지 않다. 좀처럼 습관이 되지 않는다. 흐지부지하고 즉흥적인 성격이 한 몫하는 것 같기도 하고, 팍 꽂히는 영감이 없으면 자기와의 약속에 불성실해지기 쉽다. 열정이 부족한가. 원래 족적을 남긴 작가들은 공무원 같은 작업 스타일을 갖고 있다. 일정 시간에 그리고, 일정 작업량을 달성한다. 열정이나 영감 타령은 하지 않느다. 그냥 묵묵히 한다.
반면, 나는 하루에 한 페이지 그리는 것이 마치 회피해버리고 싶은 부담, 두려움 같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못 그린 그림을 그릴까봐 두렵냐고. 그것은 내 안목이 높아져서 그림이 못나 보이는 것이라고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못 그리냐, 잘 그리냐보다, 무엇을 그리냐에 대한 문제에 마주하게 된다고. 그 때부터가 진짜 숙제를 마주하게 될 거라고. 그 숙제를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잘 안 된다. 자주 무거워진다.
나는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노동자다. 생활을 위해 붓보다 청소솔을 더 오래 잡고 있다. 며칠 동안 지원금을 타기 위해 서류작업을 하다보니 또 나와의 약속에 소홀해졌다. 다시 작업대로 돌아와 마음이 무거워 질 때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다잡게 된다. 그림밥 10년 넘게 아직도 무엇을 그릴 지 모르겠다. 매일매일이 새롭고 신선하지 않지만 아무거나 쥐어짜서라도 하루 한 페이지를 채우기로 한다. 못 그린 그림은 없다. 그림은 한 방이 아니라 오래가는 게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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