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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사자 Apr 14. 2023

다 지워야 끝나는 빙고

이기기 위한 전략은 상대를 잘 파악하는 것

고스톱, 윷놀이, 당구 

이것들의 공통점을 말해보겠다. 

일반적으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이 게임들은 시작을 하기 전에 혹은 진행 중에라도 규칙에 대한 상호간의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분명 공식적인 규칙은 존재하지만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어서 합의과정없이 게임을 진행하다가는 서로 논쟁이 발생할 수 있다.(보통은 목소리가 큰 사람의 의견 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그러다 판이 엎어지기도...)


개인적으로 고스톱에서 정식룰을 전부 숙지하고 게임을 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종종 변칙 룰이 가미되기도 하고, 어차피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이니 사소한 것은 대충 넘어가자는 분위기 속에서 게임이 진행된다. 점수를 내는 방법에서도 차이가 나기도 하고 아무튼 동네마다 주장하는 것이 다른 경우가 있다. 


온 가족이 즐기는 윷놀이에서도 비슷하다. '낙'을 쳤을 때 기존에 윷이나 모가 쌓여 있는 경우 모두 사라지느냐 남느냐 하는 논쟁도 있고, 빽도의 경우도 처음 말을 놓을 때 '도 -> 빽도' 이면 한 바퀴를 돈 것으로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논쟁을 하는 경우도 봤다. 그 외에도 다양한 논쟁들을 경험했었다 (전부 생각은 안나지만...)


당구에서도 경기를 끝낼 때 쓰리쿠션으로 끝낼지, 빈쿠션까지 해야 할지, 마지막 점수와 쿠션을 연속으로 해야 끝나는지 등 규칙을 정하기 나름이다. 결국 다 재밌게 하기 위해 그런 규칙들을 변경하고 적용하는 것이니 상호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이 세 가지 게임을 익히기 전에 친구와 '빙고' 라는 게임을 자주 했었다. 처음 접한 빙고는 5*5의 25칸의 격자 무늬를 그려서 1부터 25까지의 숫자를 임의대로 채워서 하는 방식이었다. 서로 번갈아가면서 숫자를 선택하여 해당 칸을 지워 가는데, 가로-세로-대각선으로 총 5개의 지워진 줄을 완성하면 이기는 규칙이었다. 이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금방 끝나는 가장 초보적인 수준의 게임이었다. 친구와 나는 여기서 점점 방식을 발전시켜서 더 많은 숫자로도 해보고, 칸 수도 늘려가면서 게임을 했었다. 그리고 숫자가 아니라 다른 주제로 바꿔서, 예를 들면 색깔이라던가 나라이름이라던가 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발전시켰다. 앞의 세 가지 게임들처럼 규칙에 대해 상호 합의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재미를 위해서 수월하게 변경, 적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완성된 줄의 개수로 승패를 가르는 방식이 아닌 모든 칸을 다 지워야 이기는 방식으로 게임 규칙을 변경하였다. 기억나는 것은 10*10의 총 100개의 칸을 그리고 거기에 영화 제목을 적은 때였다. 100개의 영화제목을 기억해서 채워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기기 위해서는 내 친구가 절대 적을 수 없는 영화들을 생각해내야 했고, 반대로 내 친구가 적었을 것 같은 영화도 포함시켜야 했다. 순서대로 자신이 적은 영화 제목들을 부를 때 친구가 말한 영화제목이 내 빙고판에 있으면 내가 이길 확률이 올라갔고, 내가 말한 영화제목이 친구의 빙고판에 없어도 마찬가지였다. 심리전에 강한 나는 승률이 높았다. 


한번은 담임 선생님께서 지나가시다가 빙고판이 그려져 있는 내 노트를 보셨고, 빼곡히 적힌 내용물을 보시고 놀라셨던 적이 있었다. 나는 심심해서 한 것인데, 왠지 약간 쪽팔린 기분이 들었다. 영화 이름, 나라 이름, 자동차 이름, 야구 선수 이름, 가수 이름 등등... 아무리 쉬는 시간이었어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딴 짓하다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선생님은 기억력 하나는 '천재적' 이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기억력이 좋았다기 보다는 빙고를 반복하다보니 자연스레 보지 않고도 그냥 채울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내가 대학에서 경험한 과제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도 '반복'과 관련이 있다. 그 과제는 미생물 학명을 노트에 쓰는 것이었는데, 대략 300-400개 정도 되는 미생물 이름을 기울여서 총 50번을 써서 내는 과제였다. 보통 과제 제출할 때 노트 2권 정도는 제출하게 되는데, 미생물 이름을 쓰는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되고, 한 차례 쓴 이후에는 새로운 장에다 새로 써야 하며, 미생물의 이름을 빼먹으면 안되는데, 교수님이 나눠준 미생물 학명이 적힌 인쇄물에는 미생물이 아닌 다른 이름들 (예, Homo sapiens)도 있어서 그런 이름들은 빼고 써야 했다. 그렇게 생소한 미생물 이름을 50번 쓰다 보면 거의 기계처럼 미생물 이름을 쓰는 것이 익숙해지게 된다. 나는 그때를 계기로 지금도 미생물 이름을 쓸 때 한번 보고, 그 이름을 쭉 쓸 수 있게 되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기억에 남는 미생물 학명 - Saccharomyces cerevisiae, Escherichia coli, Staphylococcus aureus, Bacillus subtilis, Chlorella vulgaris 등....





사진: UnsplashKelly Sikk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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