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씨가 된 날, 고스톱 대통령이 태어났다
나는 평소에도 ‘말의 힘’을 믿는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공기를 바꾸고 내 마음도 흔든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부정적인 말은 삼킨다.
특히 우리 집 한 달 두 번 열리는 고스톱판에서 그 ‘말의 힘’은 매번 살아 움직인다.
우리 집 ‘고스톱 4인방’은 엄마, 조카, 조카사위, 그리고 나.
손끝에 감도는 화투의 차가운 감촉,
작은 선풍기 소음 속에 터지는 웃음소리와 탄식소리.
이 두어 시간은 누가 따도, 잃어도 그저 즐겁다.
오늘도 고스톱 4인방이 모였다.
나는 첫 패를 집어 들며 늘 하던 주문을 외운다.
“첫 끗발은 개끗발이지!
이건 말버릇이 아니라 과학이야, 과학!”
물론 과학은 아니다.
첫판이든 마지막판이든, 결국 패는 랜덤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첫판에 따면 공기가 달라진다.
어깨가 펴지고, 말이 많아지고, 얼굴엔 웃음기가 번진다.
분위기는 전염되고, 기세는 흐름이 된다.
그래서일까.
‘첫판을 따면 흐름을 탄다’는 말이 은근히 그럴듯하다.
그건 과학이라기보다 심리이고,
심리라기보다 타이밍이며,
결국 믿음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오늘 그 믿음은 현실이 되었다.
초반에는 조카사위 충성이가 연승을 이어갔다.
우리 가족은 누군가 연승을 하면 “그분이 오셨다”라고 말한다.
내 쪽은 도통 흐름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말했다.
“곧 그분은 내 쪽으로 오실 거야.”
거짓말처럼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보너스패 한 장으로 패를 바꿔서 흔들고,
첫뻑으로 두 배 받고, 다음 판에서도 따고, 결국 상한가까지.
화투패가 진짜 손에 착착 감겼다.
고스톱 머니가 서서히 내 앞으로 쌓여가기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 다섯 판만 더!”
드디어 마지막 판.
패를 펼치는 순간, 심장이 살짝 떨렸다.
흑싸리 세 장.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의 보너스패.
엄마는 무광으로 들어갔고,
옆자리 엄마에게 슬쩍 패를 보여주며 속삭였다.
“엄마, 보너스에서 흑싸리 한 장만 더 나오면 대통령인데...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오늘은 전설 되는 거야.”
(우리 집에서는 같은 패 네 장이 동시에 들어오는 걸 ‘대통령’이라 부른다.)
보너스패 한 장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화투패를 넘기는 순간, 까맣고 둥그런 흑싸리 껍데기가 눈앞에 나타났다.
“와아아아!”
4인방 모두 동시에 소리쳤다.
“말이 씨가 됐어!”
흑싸리 네 장. 우리 집 고스톱 용어로 ‘대통령’ 탄생.
‘말이 씨가 된다’는 말.
그날처럼 피부로 와닿았던 적은 없었다.
물론 안다. 말한다고 모두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꺼낸 희망 섞인 한 마디가
공기를 바꾸고, 기세를 만들고, 결국 판을 흔든다.
그날 내가 놀란 건 흑싸리 네 장이 아니라,
그 장면을 먼저 떠올리고,
소리 내어 말하고, 믿었던 나 자신이었다.
나는 오늘도 말의 힘을 믿는다.
말은 언제나 먼저 움직인다.
마음보다 앞서 공기를 흔들고,
운보다 먼저 판을 바꿔 놓는다.
그 믿음으로, 다시 오늘의 새로운 ‘판’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