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 창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아부지 Aug 22. 2022

웨딩 밴드에 새겨진 문구

벗어야만 볼 수 있는 그 문구

결혼을 준비하면서 나름 가장 큰돈이 들어간 것 중 하나가 바로 웨딩 밴드(결혼반지)다.


별도 예물을 하지 않았기에 결혼반지만은 제대로 하고 싶다던 전 여친 (현 아내).


나는 사실 반대였다.


살면서 장신구라고는 군대에 있을 때 군번줄 목에 걸고 다니던 2년이 전부인 내게 반지를 그 돈을 주고 산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선시대처럼 청동 반지 옥반지도 괜찮다고 그걸로 하자 했다가 등짝 스매싱도 씨게 맞아가며 반지를 고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만이 있었지만 다른 예물이 하나도 없는 점을 감안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다른 예물이 없다는 조건으로.


그리고 사실 나도 언젠가부터 결혼반지에 대한 로망이 있기는 했다.


머리가 백발이 된 노년의 남성의 손에 빛나는 결혼반지. 그것이 언젠가부터 그렇게 멋있게 느껴졌다.


거기에 더해서 전쟁이나 지구를 구하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 항상 자신의 손에 끼고 있던 결혼반지를 벗어 딸에게 전해주며 꼭 돌아오겠노라 다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웅들은 대부분 딸이 있다. 아들에게 반지를 건네주는 장면은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기왕 이렇게 된 것 엄청 적극적으로 반지를 골랐다.


10개가 넘는 브랜드를 둘러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나도, 전 여친도 (강조하지만 지금의 아내)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고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결혼반지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것은 내가 죽을 때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그런 반지다!라는 마음 가짐이다.


디자인을 고르고 나니, 반지 안쪽에 짧은 문구를 새겨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직원에게도 물어보고 인터넷에도 찾아보니 대부분 ‘영원한 사랑’ 혹은 결혼기념일 날짜 등의 식상하지만 식상하지 않은 그런 문구들을 새겨 넣는다는 것 아닌가.


이 문구가 특별했으면 좋겠어


결혼기념일이나 상대의 이니셜 정도 생각하고 있던 전 여친이 그럼 문구를 나에게 한번 정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네이버 구글 할 것 없이 많은 사이트들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얼마 전 결혼한 친구들, 지금 결혼을 준비 중인 친구들에게도 많이 물어봤지만 대부분 그 문구에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웨딩 밴드 문구, 결혼반지 문구 등과 같이 단어 조금씩 바꾸어가며 검색을 하다 우연히 좋은 아이디어를 발견한다.


결혼반지의 안쪽에 새겨진 문구라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반지를 벗어야만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반지를 벗고 싶을 만큼 심하게 싸우거나 서로에게 실망했을 때 보고 진정을 찾을 수 있는 문구라면 어떨까?


이거다!


이것을 전 여친에게 말했고, 전 여친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리고 이틀을 넘게 고심하여 아래와 같은 문구를 만들었고, 전 여친의 쌍 따봉과 함께 동의를 받아낼 수 있었다.


평소에 장난과도 같이 전 여친은 내게 말했다.

“하는 짓이 어린애다 어린애!”


그래서 전 여친의 반지에는 아래의 문구를 세기기로 했다.


Be Generous, He is Child
이해해줘, 그는 어린 애자나


그리고 “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떨어진다!”를 항상 말하던 전 여친을 생각하며 내 반지에는 아래 문구를 세기기로 했다.


Be Obedient, She is Wise
(그녀의 말) 잘 들어, 그녀는 현명해


이렇게 우리는 서로의 결혼반지에, 서로에게 너무나 실망해서 반지를 벗게 되는 날 보고 감정을 달랠 수 있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결혼한 지 1,000일이 지났지만, 나는 한 번도 반지를 손가락에서 벗은 적이 없다.

잘 때도 끼고 잔다.


잘하고 있나 보다, 우리 부부.


근데 당신은 왜 반지를 안 끼고 다녀?


매거진의 이전글 사위는 왜 백년손님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