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왕따라고?

by 윤아부지

눈이 번쩍 떠졌다.


어제 집에 어떻게 들어왔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주섬주섬 일어나 시계를 보니 6시다.


20년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주말이지만 이 시간이면 눈이 자동으로 떠진다.


어제는 팀의 막내가 회사 일이 힘들다며 하소연을 하는 바람에 소주를 몇 병이나 마셨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토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집안이 조용하다.


아들놈도 아내도 아직 자고 있다.


집에 있어봤자 잔소리만 듣지 뭐…


그래 집에 있어봤자 바가지만 긁힐 것 같다.


에어컨도 시원하게 나오지, 주말인데 밥도 주지, 출근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요즘 팀의 일이 많이 바쁘다.


강요한 적은 없지만 토요일에 팀원들이 무료 봉사를 많이 한다.


이럴 때면 팀원들이 참 기특하다.


특근 신청도 하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 주는 팀원들을 생각하니, 오늘 점심은 국밥이라도 한 그릇 사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출근한다.


역시, 회사가 최고다.


따뜻한 아침 햇살, 창문을 열어보니 공기는 여전히 뜨거워 문을 닫고 에어컨을 튼다.


8시가 다 되어 가지만 역시 젊은 팀원들은 아직 나오지 않는다.


내가 토요일에는 무료 봉사이니 9시 돼서 출근해도 된다 했기 때문이다.


이런 팀장이 어딨어?


이크, 옆자리 김 부장님이 언제 나와 있었는지 내쪽을 쳐다본다.


어제 먹은 술도 깨지 않고 졸음이 쏟아진다.


인터넷 창을 켜서 기사를 읽다 스르르 잠이 든다.


잠시 졸다 일어난 것 같은데 9시다.


부서장님도 나와 계시는데 내가 자는 모습을 봤는지 모르겠다.


9시가 되어도 젊은 팀원들이 웬일인지 보이지 않는다.


커피나 한잔 타서 바깥바람을 쐬러 나간다.


담배 불을 붙이며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막내 팀원의 기숙사 룸메이트가 보인다.


인사나 건네 볼까 싶었는데 고맙게 먼저 말을 걸어준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엇, 그런데 부장님은 안 가셨어요?


무슨 말인가 들어보니 막내가 부서 단합대회로 1박으로 놀러 간다고 했다는 게 아닌가?


뒤통수를 세게 한대 후려 맞은 느낌이다.


분명 고향에 일이 있어서 간다고 했는데..


황급히 자리로 돌아와 옆 자리의 김 부장님께 여쭈어 본다.


젊은 사람들끼리 한번 놀러 가나 봐~


나만 몰랐다. 손이 떨리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유독 부서 내에 젊은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 것 같다.


이렇게 바쁜데 지들끼리 놀러를 갔다고?


폰을 들고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을 한다.


문자를 켜서 몇 마디 쳤다 지웠다 반복한다.


내가 왕따라니.




드디어 내일이네?


10시 휴게시간, 젊은이들의 수장 과장님, 이번 일의 방파제가 되어주기로 한 차장님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한다.


1달 전부터 계획한 부서 내 젊은 사람들의 단합대회 날이 다가왔다.


젊은 사람들끼리 모여 근교에서 서바이벌을 하고 1박 2일 MT를 가기로 한 것이다.


아주 비밀리에 준비를 했다.


꼰대가 알면 난리 칠 것이 뻔하다.


김 과장님이 서 대리님과 장을 보기로 하고 내일 아침 9시에 모이기로 약속을 잡는다.


그리고 막내 네 역할이 오늘 가장 중요한 것 알지?


차장님이 물어보신다.


오늘 나는 가미카제 특공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꼰대를 숙취에 빠뜨려 토요일 출근을 못하게 만드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다.


오늘도 팀장님을 모시고 젊은 팀원들에게 눈빛으로 파이팅을 보내며 퇴근한다.


임무 완료. 이따가 뵙겠습니다.


새벽 2시, 단톡방에 톡을 남기고 잠에 든다.


인민재판 전날에는 둘이서 4병을 마시지만 오늘은 특별히 6병을 마셨다.


내가 조금 더 많이 마신 것 같긴 하지만 집에 들어가는 팀장 뒷모습을 보니 내일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란 확신이 든다.


9시 집결 장소에 부서 젊은 사람들이 모여 짐을 정리하고 서바이벌 장소로 이동했다.


모두 군복으로 갈아입고 페인트 총을 들고 웃으며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문자가 한통 날아왔다.


이렇게 바쁜데 니들끼리 재미있냐? 씨뻘


당황스럽다.


나 말고도 팀원들 몇 명이 같은 문자를 받았다.


방파제가 되어주기로 한 차장님이 본인이 책임질 테니 재미있게 놀자고 하신다.


찝찝하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월요일 아침.


메신저에 단체 방이 만들어진다.


팀장님이 팀 회의를 소집했다.


지난 주말에 단합대회 다녀온 사람 손 들어 보세요!


방파제 차장님을 필두로 팀원들의 절반이 손을 든다.


이렇게 바쁜데.. 를 시작으로 언성이 높아진다.


다 나가고 차장님만 남으라고 한다.


1시간이나 욕을 먹고 온 차장님은 괜찮다며 팀원들에게 윙크를 날린다.


차장님, 고생하셨습니다.
괜찮아, 다 예상했던 일이 자나.


단합대회를 다녀온 뒤 일주일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끼리 소주를 한잔 할 때면 그날의 팀 회의 분위기 이야기가 안주거리로 나온다.


지난 주말에 단합대회 다녀온 사람 손 들어 보세요!


성대모사를 하면 웃음이 터진다.


주말 개인 시간을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보내는 모습이 그리도 보기 싫었나 보다.


그렇게 꼰대는 더욱 왕따가 되어간다.


아랫사람들은 더욱 똘똘 뭉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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