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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즈플 Sep 06. 2023

약을 먹는 게 맞나?

늑대물린여자 08



그렇다고 해서 병에 걸린 것이 좋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웃음)


그럴 리가 없다. 단지 나의 경우 몇 달 내내 이곳 저곳이 질병으로 힘들었기 때문에 루푸스 진단을 받았을 때 '아,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이다. 

입원도 하지 않겠다고 버텼던 나쁜 환자인 나는 입원 대신 약을 한 움큼 받아왔다. 약기운으로라도 이 위기를(?) 잘 넘겨보라는 의사의 의도였다. 첫날 저녁, 손바닥 가득 들어차는 알약들을 입 안으로 넘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 동안 고민했다.


이 약을 먹기 전에도 나는 나름 잘 살아왔는데 (단언컨대 그 기억은 그냥 미화된 거다.) 이 많은 약들을 꼭 먹어야 할까? 한번 먹기 시작하면 평생 동안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는데. 약을 안 먹고도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현대 의학이 나를 더 아프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정수기 앞에서 온갖 생각들이 실타래처럼 엉켰다.


처음 루푸스 확진판정을 받았을 당시, 나는 정신건강전문요원을 준비하던 사람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만나는 대상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오랜 기간, 혹은 평생 동안 약을 먹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의 면담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생각과 걱정을 이미 내게 쏟아낸 바 있었다.


"선생님, 제가 약을 금방 끊을 수 있을까요?"

"약을 먹고 싶지 않아요. 부작용 때문에 힘들어요."

"한번 약을 먹으면 계속 먹어야 되나요? 언제쯤 끊을 수 있나요?"

환자들이 토로하던 걱정들이 느리게 머릿속을 헤엄쳤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삶이 있었다. 그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용기를 내어 치료를 선택했지만, 약이 충분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 그런 불만과 걱정을 토로했다. 

면담 당시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답을 했었나. 진심으로 그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었는가 내가 너무 오만하게 상대방의 생각을 재단하고 판단 내리지는 않았었나.


'약을 먹으면 나아질 텐데 왜 안 먹으려고 할까? 답답하다.'

'도움을 주고 싶은데 왜 받아들여주지 않을까? 속상하다.'     


그래, 나는 단순히 내 입장, 치료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했었다.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으나 그것보다 작용이 더 크므로 약을 먹는 게 맞다.’


교과서적인 이야기였다. 지금도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때는 그 말이 진리였고 어떻게 그 문장을 틀렸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상상하지도 못했다. 나는 힘들다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보다 그 진리 안으로 설득하려 들기만 했다.


“충분히 공감하고 위로했나요?”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슈퍼바이저 선생님은 내가 환자들에게 충분히 공감해주고 있는지 물었다. 그때는 자신 있게 잘하고 있다고 대답했으나, 현재 같은 질문을 듣는다면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충분히 공감했는가. 

공감과 위로는 상대방의 마음을 열고 라포를 쌓는 첫 단계이다. 나는 대상자들의 마음을 쉽사리 공감한다고 떠들며 내 마음을 그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기만 하지 않았을까. 약봉지를 든 채 하고 있는 생각이 그때 환자들이 하던 생각과 다를 게 무엇일까. 

사람이 입장 따라 발을 뻗는다더라니 막상 약을 앞에다 두고 하는 생각이란 비겁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약을 드세요. "라고 말하는 나의 잔상을 앞에 두고 정수기의 물을 따랐다. 손바닥 가득인 약은 한 번에 삼키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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