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물린여자 09
도전을 극도로 꺼리는 성격인 내가 처음으로 인생의 방향을 크게 틀어 다니던 직장도 관두고 정신건강전문요원이라는 새로운 진로로 키를 돌렸다. 수련을 잘 마치기 위해서는 몸 상태가 안정적이어야 했다.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환자들을 눈앞에서 너무 많이 봐왔던 나는 절대 그런 실수를 범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했다.
잘할 수 있을 거야. 막연한 다짐이었으나 잘할 자신이 있었다. 약을 처음 먹기 시작할 때엔 큰 결심이 필요했지만 꾸준히 먹는 것은 생각보다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약을 먹으면서 가장 먼저 나타난 변화는 홍조가 사라진 것이다.
고용량의 스테로이드를 먹어서일까. 어떤 좋은 파운데이션과 컨실러를 써도 사라지지 않았던 볼의 붉은 기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신기해서 동생과 함께 거울 앞에서 한참 동안 뽀얗게 변한 피부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를 제외하면 이런 피부는 처음 보았다. 원래 내 피부색이 하얀 편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다음에는 머리카락이 덜 빠지기 시작했다.
한번 샤워를 할 때마다 수채구멍을 두세 번씩 비워야 할 정도로 빠지던 머리카락이 덜 빠지고 색도 더 이상 연해 지지 않았다. 늘 바람같이 흩날리던 머리카락이 제 무게를 되찾아 아래로 늘어졌다. 관절통도 예전보다는 나아져 문고리도 못 열정도로 힘없던 손가락에 제법 힘이 들어가게 되었다. 구내염이나 질염 같은 자잘한 염증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피로는 여전했고, 관절통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 테이핑을 풀 수가 없었다.
욱신욱신 쑤시는 손가락은 아침이면 퉁퉁 부어 칫솔질을 하기 힘들었다. 과제를 하고 요법과 면담을 하는 내 일상 하나하나가 여전히 무거운 추를 단 듯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그 후,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이 찾아왔다.
얼굴은 볼과 턱이 둥글게 부었고 식욕이 갑자기 늘면서 늘 허기지고 동시에 속이 쓰렸다.
그 당시의 나는 약을 먹으면 마법처럼 병이 해결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의사 말만 잘 들으면 돼, 약만 잘 먹으면 돼.라고 주문처럼 되뇌었다. 약을 안 먹는 것 보다야 훨씬 나은 선택지이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약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이나 다름없었는데 인지하지 못했다.
이렇게 부작용을 겪으면서도 약을 먹는데 왜 내 증상들은 호전을 보이지 않는 건지. 어째서 아직도 하루하루가 이렇게 힘든 건지 답답하기만 했다.
약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약이 아니라 신물질 아닐까? 지금에서는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그 당시의 나는 작금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왜 약을 먹고 있는데! 왜 아직도 아프냐고!”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장 속 나는 늘 화가 나 있었다.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 가져온 나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회색빛으로 얼룩덜룩해져 있었다.
나의 취미 중 하나는 불렛저널인데, 빈 노트에 나만의 양식으로 어여쁘게 일기장을 꾸미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 일기장을 꾸미는 것은 고사하고 노트는 감정을 배설하는 용도로밖에 쓰지 않았다. 내 일기장이 꼴도 보기 싫었다. 그 노트에는 싫은 감정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으니까.
나는 항상 불이 붙은 개처럼 살아온 사람이었다. 아마 많은 루푸스 환자들이 그러리라.
루푸스라는 질병을 알기 전까지 남들과 같은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너는 왜 그래?’, ‘왜 너만 유난이야?’라는 말을 들어가며 안간힘을 낸다. 스스로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쉬는 법을 잊은 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내 모습과 겹쳐지면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항상 달리기밖에 하지 못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억지로 고삐를 씌우자 자신의 불안을 발산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속에는 많은 울분이 쌓였다. 이대로 서 있으면 안 되는데, 금방이라도 달려가야 하는데, 하면서. 결승점이 눈앞에 보이는 시점이라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억울함을 속으로 폭발시켜 가던 가운데, 약을 줄이고 싶다는 충동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기이한 충동은 아마 내 일상과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단 하나라도 내 마음대로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나는 말 잘 듣는 환자잖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평생 약을 먹을 수는 없어.’
아직 증상이 잔존하고 완전한 관해기에 들어서지도 않았으면서 오만하게 자기 멋대로 진단을 내렸다. 아예 약을 안 먹는 짓을 감행하기는 어려웠던지라 소심하게 일탈을 시도했다. 위장보호제였다.
한국에서는 쓸데없이 약을 너무 많이 처방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난 다음 날 벌였던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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