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즈플 Sep 09. 2023

멀리서 보면 뻔한 결말

늑대물린여자 10



위장약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내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약을 조절은 하지만 안 빼먹고 잘 먹고 있잖아?'

몸이 가볍고 집중도 잘 되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나 느껴지던 위의 더부룩함도 덜했다. 가장 중요한 스테로이드를 꼬박꼬박 챙기고 있으니 괜찮겠지. 

자연스레 요법을 진행하며 콧노래가 흘러나오고, 몇몇 환자들이 오늘 선생님 기분 좋아 보인다는 말에 고맙다고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 내 병을 아직까지도 무겁게 생각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한 번도 루푸스로 응급실을 가거나 쓰러지지 않았으니까. 크게 앓지 않았으니까. 위염이니 구내염이니 하는 질병은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피곤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니 당연하게 따라붙는 영광의 상처 같은 것들이랄까.

모두들 흔히 겪는 질병이잖아? 



당신은 감기약을 받으면 끝까지 다 먹는가? 

부끄럽지만 나는 감기약을 처방받고 끝까지 다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적당히 증상이 가라앉았다 싶으면 약을 중간에 그만 먹어도 아무 문제 없이 살아왔다. 

그래서 이번에도 괜찮을 줄 알았다. 그래, 다 변명이다.





나는 루푸스를 진단받기 전부터 전조성 편두통으로 인해 예방약으로 토파맥스라는 약을 복용 중이었다. 그 약을 먹지 않을 핑계도 생겼다.


‘스테로이드 자체가 통증완화에 도움을 준다며. 그럼 두통예방약은 어차피 필요 없는 것 아니야?’

스스로 진단을 내리고 법봉을 쾅쾅쾅 두드리고는 손에 힘이 없어 언제나 헐렁하게 풀어두는 약병 뚜껑을 세게 닫아버렸다. 다시는 열 일 없을 거라는 선고 같은 행위였다.





  

이삼일 지났을 뿐인데 약물을 뺀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아침에 일어날 때 속이 쓰라려 등을 둥글게 말며 일어나야 했다. 돌아왔나 싶었던 식욕은 다시 가출을 해 점심 한 끼 달랑 먹는데도 그다지 먹고 싶지 않았다.

    

‘에이, 스테로이드 때문에 얼굴이 이렇게 호빵이 됐는데 안 먹는 게 낫지. 안 그래도 얼굴 붓는 거 신경 쓰였었는데 잘됐다.’


어떻게 해서든 내가 내 삶을 통제하고 싶었다. 병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약을 먹는 것만이라도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비웃듯 전조성 편두통이 인사하며 찾아왔다. 

요법 중간에 눈앞에 암점이 생겼다. 시야에 흐릿하게 오래된 흑백텔레비전처럼 지지직거리는 현상이었다.


전조성 편두통극심한 편두통이 찾아오기 전, 몸에서 다양한 전조증상을 보이는 질병이다. 나의 경우에는 눈의 암점을 시작으로 30분~1시간 동안 속이 안 좋아지고 구역질을 하다가 두통이 찾아온다. 점점 두통이 심해지면서 빛공포, 소리공포가 커진다. 스스로의 숨소리, 말소리, 형광등 불빛이 모두 예민한 통각이 되어 나를 찔러오면 몸이 벌벌 떨리기 때문에 어둡고 조용한 방구석에서 응급약을 먹고 증상이 가라앉을 때까지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


예방약을 꾸준히 복용하면서 조금 심한 편두통 정도로 약화되어 지나갈 수 있었던지라 나는 착각하고 말았다. 내가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쓰나미를 조금 큰 파도 정도로 미화하고 있다가 막상 몰려오는 자연재해에 무참히 휩쓸리는 것이라. 

사람들이 많은 회사에서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찾아온 편두통을 손 쓸 수 있는 방법은 적었다. 완벽한 암실이 아닌 이상 외부 자극은 피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밝히며 양해를 구하는 것이 나는 참 어려웠다. 내가 부족하다는 반증 같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설명 없이 여상하게 제가 전조성 편두통이 왔는데 조금만 쉬고 오겠다고 말하는 수련생이라니. 얼마나 이상해 보였을까. 그 당시 그게 무엇인지 설명해 보라는 말보다 긴 말없이 쉬고 오라고 해주었던 주임님께 아직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날을 시작으로 삼일동안 매일, 매일 증상이 찾아왔다. 결국 나흘 째 아침, 거의 기어서 병원을 찾아갔다. 외래진료실 앞에서도 외투로 눈을 가린 채 누워있는 나를 간호사가 부축해 진료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바로 처치실로 나를 보냈다. 

진한 진통제가 혈관을 타고 들어가고 나서야 눈물이 그쳤다. 토파맥스를 잘 먹고 있냐는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은 나니까. 의사 선생님은 나를 혼내지 않았다.


“여기 환자들 보면 답답하지요?”


뇌신경과에 앉아있는 많은 환자들은 휠체어나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보호자가 필요한 환자들이었다. 


“답답할 수 있지만 약을 잘 먹어야 해요. 전조성 편두통은 뇌졸중의 주요 위험인자예요.” 


나는 나도 모르게 목구멍까지 질문이 나오려는 걸 꾹 삼켰다.


'선생님, 이 병이 왜 생겼을까요?'


모든 환자들이 한 번씩은 생각할 질문이리라. 이 병은 왜 내게 생겼을까. 내가 뭔가 잘못했을까? 내가 잘못 살았을까? 내가 뭔가 실수했을까? 


환자들도 늘 내게 같은 질문을 했다.


“왜 내게 이런 병이 찾아왔나요?”


나는 그때 어떻게 답했더라.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답답하고 쓸쓸한 질문이었다.


그날 저녁부터 약은 증량되었다. 증량된 약을 먹고, 위장약도 다시 챙겨 먹기 시작했다.

이삼일이 지나고, 속이 불타는 것처럼 쓰리고 헛구역질을 하던 증상은 사라졌다. 나는 굳이 겪지 않았어도 되는데 꼭 혼나봐야 깨닫는 사람이었다.

이전 09화 스테로이드는 마법이라면서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