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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즈플 Sep 11. 2023

루푸스 가는 데 레이노 따라온다

늑대물린여자 11



함박눈이 내리고 또 내렸다. 질척해진 눈 위로 또 눈이 내려 덮이고, 그걸 치우자마자 또 덮이기를 반복했다. 

산속의 겨울은 참 추웠다. 서울에서는 괜찮은 날씨라고 분명 생각했는데 사무실에서는 오들오들 떨게 되는 날씨가 계속되었다. 고3 때처럼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곱아드는 발가락을 곰질거리면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자면 매서운 산바람이 말 울음소리처럼 창문을 긁고 지나갔다.


가을부터는 과제가 너무 많아져 주 3일 출근으로 해결하지 못하게 되었다. 매일 출근해 10시까지 남아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상이었다. 집을 오고 가는 시간이 가장 아까운 시기였다.


그때쯤, 오른손 둘째 손가락이 희게 질려 차갑게 느껴졌다. 퇴근하고 돌아와 샤워를 할 때면 피가 통하지 않는 듯 새하얗게 변한 손가락을 보면서 하도 추워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나는 참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8시 반까지는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집에서 아침 6시 반에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새벽에 차갑게 식은 핸들을 잡았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을 억지로 꼬아 핸들을 돌리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어라, 내 손이 이렇게 파랗던가?'

관절통과 파스 때문에, 테이핑 때문에라고 넘기던 생각이 불현듯 든 의문에 움찔거렸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운 차 안에서는 내 손을 확인할 수 없어 불안한 생각이 크기를 키웠다.

남양주 톨게이트를 지날 무렵에서야 동이 텄다. 해가 반짝 떠오는 아래에서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지의 둘째 마디까지 새하얗게 색이 바래어있었다.






주말마다 찾는 마취통증의학과에서 손가락에 대해 물었다. 찍어놓은 사진도 보여주었다. 의사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했다.


“사람마다 통증을 느끼는 방법이 다 달라요. 환자분은 통증을 차갑게 느끼는 겁니다.”

“아니, 분명 하얗게 변했는데요.”

“지금 겨울이 오니까 손이 하얗게 변할 수 있죠. 수족냉증 아시죠?”


답답했다. 수족냉증? 말도 안 된다. 나는 수족냉증은커녕 그 반대되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한겨울에도 손발이 따끈따끈한 사람이 나였다. 친구들은 겨울이면 붕어빵마차를 찾듯 내 손을 잡았고, 여름에는 뜨겁다며 손을 피했다. 나는 살아있는 손난로 같은 사람이었다.

의사는 살다 보면 체질이 바뀔 수도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손발을 따뜻하게 해도 아프다고 말해도 들어주질 않았다. 장갑을 끼고 수면양말을 신어도 그 안에서 깨질 것처럼 손가락과 발가락이 아픈데 이 고통이 그냥 수족냉증이라니.


나는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그렇군요, 제가 예민한 거군요. 라며 순응하고 참아봤던 사람이다. 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길로 류마티스 내과를 찾았다. 당일 진료는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했지만 기다리겠노라 말하고 대기실에서 두 시간을 기다려 주치의를 만났다.


“골치 아프네… 레이노 증후군이 온 것 같네요.”

“레이노요?”


루푸스에 이어 레이노. 뭐가 이렇게 다 괴상한 이름들 뿐인지. 혼란을 갈무리하지 못한 나에게 의사는 다음 주 검사 예약을 잡아주겠다며 한번 더 병원을 찾아오라고 했다.






레이노 증후군 검사는 특이했다.

일단 손에 검사를 해야 한다며 혈관 연결을 위해 발등을 더듬거리더니 주사를 놓았다. 그리고는 플라스틱 대야 안의 얼음물에 손을 담갔다. 손이 차가워지면서 통증이 밀려왔지만 10분간 참아야 한단다.

아니나 다를까, 새하얗게 변한 손가락을 얼음물에서 꺼내 왼손과 오른손을 함께 엑스레이검사판 같이 생긴 곳에 대고 스캔했다.


혈관 검사도 했다. 손가락 끝의 모세혈관이 어느 정도 분포되어 있는지 확대해 관찰하는 카메라로 손가락을 촬영했다. 미세한 바늘귀 같은 모세혈관들이 내 손톱과 손가락 끝에 박혀있는 모습이 화면으로 보이는데 학창 시절 처음 현미경을 들여다볼 때처럼 신기한 느낌이었다.



검사결과는 바로 나왔다.

수족냉증은 무슨, 주치의가 예상한 대로 레이노증후군이 맞았다. 일반인보다 현저하게 적어진 모세혈관 수를 갖고 있다고 했다. 아마 루푸스를 앓게 되며 모세혈관이 많이 줄었을 것이라며 혈관확장제를 처방받았다.

추위와 스트레스를 피하라는 조언과 함께 작은 알약통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따뜻하게 입고, 손발도 따뜻하게 유지하고, 스트레스를 최소화해야 한단다. 마지막 경고야 익숙하게 넘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합병증이 하나 추가되었으나 이 정도면 그래도 심각하지는 않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유병률도 높은 것이 더 안심이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레이노 증후군은 바늘 가는 데 실 따라가듯 자가면역질환을 가진 환자들이 이차성 질병으로 많이 얻는 질병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수족냉증과 다를 바 없다며 손발만 따뜻하게 해 주면 되는데 왜 호들갑이냐는 댓글도 보았다. 무례해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타인이 어떻게 고통을 받는지 모를 때는 함부로 말을 얹지 않으면 좋을 텐데. 손이 정말 많이 아프고 저린데 저 댓글을 적은 사람은 고통을 모르면서 손을 놀리고 있었다.


그들의 말처럼 레이노 증후군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참 좋겠지만, 레이노는 마냥 방치하다가는 손발 괴사까지 올 수 있는 병이다. 적절히 치료하고 관리해주어야 하며 특히 2차성 레이노 증후군은 자가면역질환의 증상 중 하나로 발현되었기에 그 증상이 악화될 확률이 높았다. 피부경화증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기에 주의해 살펴야 한다고 했다. 내 몸을 내가 더 잘 살펴야 한다고 했다.






추위를 피하려면 공기 자체가 따뜻해야 했다. 당시 회사는 그게 가능한 환경이 아니었다. 사무실은 공기 자체가 추웠고 손난로와 장갑만으로는 손이 푸르죽죽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혈관확장제를 먹으면 편두통이 생겼다. 아직 겨울 초입이었고 동장군은 발끝도 들이밀지 않았다. 


눈을 뭉치는 것을 좋아했는데, 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더 늘었다. 겨울을 좋아했는데 올해부터는 조금만 좋아해야 할 듯싶었다.

좋아하던 것들을 한 발짝 멀리하게 되는, 서글픈 11월 끝자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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