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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즈플 Sep 13. 2023

손가락에 마비가 온 날

늑대물린여자 13



나는 취미가 많은 사람이다.


빈 노트에 나만의 불렛저널을 직접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는 색색의 마스킹 테이프와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여 꾸몄다. 그러나 역시 검은 펜과 몇 가지 색의 볼펜만으로 간결하게 꾸며도 예쁜 무늬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고, 충분히 일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음을 안다. 


피아노를 제법 오래 쳤다. 체르니 50과 바흐까지 뗐다. 성인이 되고도 돈에 여유가 생기면 꼭 교습을 받을 정도로 피아노에 애착이 남달랐다.

지금은 집에 자리가 없어 피아노가 사라졌지만 연습실을 빌리거나 직장에 피아노가 있으면 점심시간에 연습을 할 정도로 그 운율을 사랑했다. 내가 건반을 노니면 흘러가는 손가락에 따라 나의 감정이 음악이 된다는 사실이 사랑스러웠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어릴 때부터 돈이 안 드는 취미 생활을 찾다 보니 독서와 그림 그리기를 붙잡고 있었다. 활자 중독이었던 만큼 받아들인 정보를 말로 표현하기보다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이 능숙했고, 글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지러이 떠다니는 머릿속의 구름 같은 단어와 생각들이 정리되어 종이에 나타나면 그것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을 좋아했다. 일기장에 선생님이 한마디 써주는 표현을 사랑했고, 친구들이 그림을 잘 그린다 호들갑 떨어주는 것을 기뻐했다.


뜨개질을 좋아한다. 생각을 비우고 손을 놀리다 보면 편물을 만들듯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며 무늬를 그리는 것이 참 아름다웠다. 어머니는 뜨개질을 아주 잘하셨는데 어린 마음에 가족들 조끼와 손가방까지 뜨는 어머니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였다.

내가 서툰 손으로 하도 풀었다 뜨기를 반복해 손때가 잔뜩 탄 꼬질꼬질한 목도리 첫 부분 뒤는 어머니가 마저 떠주어 포실포실하고 매끈했다. 그때 나도 이렇게 뜨개질을 하고 싶다고 다짐했는데 지금은 그런 각오는 치워두고 그저 뜨개질이 좋다. 바늘이 움직여 만들어내는 나의 작은 창조물이 어여쁘다.



이렇게나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나는 늘 바쁜 사람이다. 집 밖을 나갈 시간이 없어 친구들이 아우성이다. 어느 것 하나에 집중을 해야 실력이 늘 텐데.(웃음) 다 손을 대다 말아서 어중간한 실력들이다. 


그럼에도 모두 즐겁게 하고 있는 이 취미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손’을 사용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손으로 행해야 한다. 다행히도 취미로 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섬세함을 갖고 태어났기에 커다란 손으로도 작달막한 것들을 곧잘 쪼작거리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왔다.






바람이 흰 숨을 담았던 계절이 지나갔다. 레이노 증후군과의 싸움을 견디고 나서 털장갑을 벗을 수 있게 된 봄이었다. 한들거리는 토끼풀에도 꽃대가 올라와 소담한 꽃들이 군데군데 피었고 환자들이 성급하게 파카를 벗고 산책을 나섰다가 빨리 들어가고 싶다며 조르는 변덕스러운 계절이었다. 





“선생님, 눈꽃이 올라왔네요?”

“꽃눈이에요.”

“눈꽃이에요.”



한 환자와 목련에 올라온 꽃눈이 눈꽃인지 꽃눈인지를 두고 한참을 실랑이하다가 웃어버린 날이었다. 오후 요법으로 문예요법을 계획해 놓았다. 나는 문예요법 때 꼭 마인드맵을 활용했다. 병원에 오래 입원한 환자들은 외부와 소통하지 못하며 주제에 따른 연상작용을 할 기회가 적어진다. (우리 모두가 따로 생각을 하지 않고 살면 그렇다.)

문예요법 시간에 각자 바로 글을 적게 하기보다 다 함께 주제와 관련한 경험이나 느낌을 나누는 시간을 주면 함께 공감하고 소통하며 마음의 지도를 뻗어나갈 수 있었다. 그들의 언어를 칠판에 넓게 받아 적는 것을 좋아해 보드마카를 사용해 칠판 맨 위부터 맨 아래까지 모두 쓰고는 했다.


점심시간 동안 짧게 자리에 앉아 졸다가 병동으로 올라갔다. 보드마카로 글씨를 쓰고 있는 손에서 마카가 툭 떨어졌다. 다시 쥐어 몇 글자 쓰자 다시 저릿한 느낌과 함께 마카는 손에서 굴러 떨어졌다.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과 함께 심장이 철렁했다. 눈앞에는 환자들이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었고, 아직 다 채우지 못한 마인드 맵이 칠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마카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손은 주먹을 쥐지 못하고 떨리고 있었다.


왜 이러지?


순간적인 두려움이 울컥 밀려들어 눈물이 핑 도는 것을 꾹 삼키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 마카를 끼운 채 엉망인 글씨로 요법을 마무리했다. 한 시간 내내 주먹이 쥐어지지 않았다.

사무실로 내려와 손목보호대를 집어던지고 파스를 떼어냈다. 주먹을 쥐려고 하거나 팔을 쫙 피려고 하면 손이 덜덜 떨렸다. 손가락에 거의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인체공학 키보드도 손가락 마디마디를 완전히 굽히기가 어려워 잘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정말 순식간에,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무슨 일이야. 대처할 방법을 모르고 일단 손을 계속 주물렀다. 저린 건가 싶었다. 평소와 같은 관절염의 증상이 아니었기에 더욱 무서웠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손으로 내가 뭘 할 수 있었는지, 이 손을 못쓰면 뭘 할 수 없게 되는지에 관하여 온갖 나쁜 상상을 했다.


그날은 결국 손이 움직이지 않으니 일도 거의 하지 못하고 기숙사로 들어왔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거야. 울렁거리는 가슴을 꾹꾹 누르며 억지로 잠재웠다.

루푸스라는 게 염증만 일으킨다고 했지 마비가 온다든가 하는 말은 없었잖아.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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