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즈플 Sep 14. 2023

불면증이 시작되다

늑대물린여자 14



일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면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일과였는데 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게 되고는 할 수 있는 게 참으로 없었다.

그전까지는 자연스럽게 행해왔던 많은 취미들이 모두 손을 사용하는 행동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빨리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따뜻한 찜질만 반복했다. 손을 번갈아가며 찜질팩을 대고 누워있다 보면 딱 내 키만 한 작은 1인용 침대 끝자락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안 나으면 어떡할래?

이제 어떻게 살래?


형체 모르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침대 아래로 나를 이끌고 내려갔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디오 북을 듣는 것밖에 없었다. 혹은 친구와 간간히 전화통화를 하는 정도일까.

힘을 주어 주먹을 쥐려 하면 어김없이 덜덜 떨리는 손이 '넌 평생 그렇게 살 거야.'라고 말하는 느낌이라 자꾸만 눈물이 났다.

회사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퇴근하고 나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 곳에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은 산속의 병원이었다. 날 누군가 데리고 두 시간 거리를 나가지 않는 이상 병원을 갈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손이 이 모양인데 기숙사 밖으로 차를 타고 퇴근을 한 후, 다음날 출근을 할 수 있을는지. 신입직원이 다음날 바로 연차를 내는 행위 또한 하지 못했다. 예전 직장들에서도, 지금 직장에서도 미리 연차 신청서를 제출해야 하니까.

이런 일로 자꾸 빠지다가 혹시 진짜 필요할 일이 생기면 어떡할까.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해 하루하루가 어영부영 넘어갔다. 그러다 기숙사로 돌아가면 "내가 아직 괜찮으니 넘어가는 거지." 하고 자기 위안을 했다.

주말까지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월요일에도 연차를 써놓았으니 쉬면 나아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불안감이 좀먹은 밤에 잠은 찾아오지 않았다. 분명 피곤하고 눈이 아픈데도 한참 동안 누워있으면 작게 이명이 들렸다. 저 멀리서 기차 기적소리처럼 삐- 울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룸메이트와 함께 쓰던 기숙사 방이 그 일이 터지기 몇 주 전부터 다행히 혼자 쓰게 되며 외부 자극이 덜했다는 점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이런 점에서는 난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불면증에 대처하는 방법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시도해 보았으나 효과가 전혀 없었다. 밤새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지쳐 쓰러지듯 잠이 들면 30여분 후 일어났다.

나중에는 분명 눈꺼풀을 감았는데도 감지 않은 느낌이었다. 눈을 감았는데도 눈꺼풀 너머가 보이는 것 같은 착시현상이 생겼다. 얇은 눈꺼풀 너머가 여리게 보이는 기분이었다. 붉은 실 같은 모세혈관이 모두 느껴지고, 누군가 내 눈에 강한 직사광을 끼얹은 듯 주황색, 노란색으로 빛나는 세상이 비쳤다.


눈을 감은 것이 더 괴로운 세상. 눈은 토끼처럼 빨개지고 감각은 예민해져 타인의 농담에도 웃지 못하게 되었다.


이성은 '너는 지금 눈을 감고 있어. 빛을 차단하고 있어.'라고 끊임없이 말하는데도 본능은 ‘눈이 부셔. 눈 좀 가려줘. 머리가 아파.’라고 속삭였다.

눈이 아파 눈물이 줄줄 흘렀고 괴리감에 고통스러워 몇 번이나 세수를 했다.


눈을 감았는데도 감지 못한다.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일의 효율은 극악이었다. 움직여지지 않는 손으로는 요법에 참여한 환자가 누구인지 작성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 환자 개개인에 대한 평가와 면담기록 등은 나날이 밀리고 있었다.

그 일들은 미래의 나에게 부담이 되리라는 사실이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되어 어깨를 짓눌렀다. 


모든 에너지를 그러모아 병동에 쏟아붓고 나면 사무실에서는 최소한의 사회성을 발휘할 힘도 남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자니 상사는 힘들다고 쳐져있지 말고 좀 더 힘을 내서 사무실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고 했다.


그게 막내 역할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지금 너무 힘든데. 막내 역할을 못하면 그냥 퇴사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목구멍까지 기어올라오는 말을 집어삼켰다.


이만한 곳도 없어.’, ‘다른 곳에 가면 더 힘들어.’, ‘여기는 그나마 대우가 좋은 거야.’ 입사 후 끊임없이 들었던 말들로 나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힘든 몸도 마음도 내리누르는 하루하루였다. 


불면증은 어느새 습관처럼 내 일상에 자리 잡았다.

이전 13화 손가락에 마비가 온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