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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즈플 Sep 16. 2023

당신은 당신의 병을 마주했나요?

늑대물린여자 16



월요일 연차날이었다. 병원은 예약환자를 받지 않았다. 온 순서대로 환자와 상담을 진행하는 식이었고, 9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5명의 환자가 앉아있었다.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할까. 늘 반대편에 서 있다가 환자의 입장에서 말을 꺼내려고 하니 조금은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MSE(정신상태평가)니 초기 상담이니 상대 쪽에서 나를 상담하는 도구들이 있을 테니 몸만 들어가면 될 테지만, 그래도 많은 환자들이 그러하듯 최대한 ‘멀쩡’해 보이고 싶었다.


처음 의사를 마주하고 내가 정신병원에서 근무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꽤나 절박하게 접수처에 문의한 사람 치고는 내 상태를 말할 때는 담담했다.

손으로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인데, 손이 아파서 잠깐 정신이 나갔던 것 같다고. 거기에 불면증이 겹쳐서 더 우울했다고.


의사는 내 병력과 그간 있었던 우울감, 과거력, 가족력을 천천히 들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들으며 키보드로 타닥거리는 소리가 진료실 벽에 부딪쳤다.

햇빛이 들지 않는 북향의 진료실, 조도가 낮은 방 안은 공기도 느리게 떠다니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던 그는 내게 급성우울증 같다고 말하며 물었다.


“루푸스를 제대로 마주했나요?”


눈을 한 바퀴 굴리고 그렇다고 답하자 의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닌데, 루푸스 생각 안 한 것 같은데.”



2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항상 열심히 약을 먹고 질병을 피하지 않았다.

외래진료도 꾸준히 다닌 나에게 루푸스를 마주하지 않았다니? 내 지금까지의 노력을 폄하하는 듯한 의사의 언행에 나는 매우 불쾌해졌다.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하고 협조적으로 일관하던 ‘좋은 환자’ 태도에 금이 갔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큰 질병이잖아요. 루푸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었는지 묻는 거예요.”

“당연히 했죠.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루푸스가.. 루푸스 걸린 게…”


루푸스에 걸리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내가 얼마나 많이.


힘이 들었나? 지금 와서 글로 정리할 때야 루푸스에 걸리기 전에도 이런 일들이 있었다는 둥, 레이노도 걸렸고 손가락 마비도 왔다는 둥 이야기하고 있는 나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인식조차 없었다.

그저 약을 먹으면 괜찮겠지. 그냥 잘 지낼 수 있겠지가 전부였다. 


자세히 알아볼수록 루푸스는 심각한 병이었고 카페 등에서는 정말 아픈 사람들이 많았다. 잘 지내다가도 10년 후, 20년 후 어느 날 활성기가 와 심각해졌다는 이야기들을 보고 있자면 그게 내 미래 같아서 더는 찾아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덮어버렸다. 

좋게 말하면 낙관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책임한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으로 내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에게 당당히 대답했어야 하는데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마저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격한 반응을 보인 순간 아차 싶었으나 의사는 당연히 그 순간을 잡아내었다.


“다음 주까지 루푸스에 걸린 후 내 감정이 어땠는지 생각해 보고 정리해 오세요.”


너무 잔혹한 직면이었다. 적어도 그 당시의 나약한 내게는 너무 아픈 처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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