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물린여자 13
퇴근길, 이제는 흐드러지게 흰 목련이 피었다.
기숙사 옆에는 자목련이 피었는데 그 선명한 자주색이 마치 피 같다는 생각을 불현듯 하고 있었다. 어여쁜 양단치마 같은 보드라운 꽃잎이 달린 나뭇가지가 충분히 튼튼한가? 예쁜 나무를 보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우울한 생각이 이어졌다.
화들짝 놀라 아무도 없는 텅 빈 주차장을 벗어났다.
‘정신 차리자.’
호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도 있지 않나. 나약해 빠진 소리를 하면서 자리에 멈춰 서있으면 될 것도 안된다.
기숙사 방으로 들어와 창문과 문을 동시에 열어 환기를 시켰다.
봄이 오면 나무들이 기가 막히게 온도의 변화를 먼저 알아챘다. 겨우내 앙상하던 가지에 여린 풀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세상은 날로 따뜻해져 가는데 나만 뒤 따라잡지 못하고 나쁜 생각을 하다니.
다행스럽게도 손은 조금씩 나아졌다. 오른손이 덜덜 떨리는 증상은 여전했지만 무언가를 쥘 수 있다는 게, 손가락을 굽힐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던가. 의식적으로 손에 붙은 파스를 만지작거리면서 되뇌었다.
“나는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러나 그 응원은 참으로 나약하기 그지없다. 밤이 되자, 어둠이 다시금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낮에는 햇빛 때문에 어스름하던 감정이 어둑서니를 먹고 덩치를 잔뜩 키워 나와 함께 누웠다. 그것은 나를 따라 누워 웃고 있었다.
“무섭지? 또 손이 안 움직이면 어쩔래?”
“이번에는 아예 안 움직이면?”
“굳어버리면 너는 어떡할 거야? 뭐 먹고살래?”
“입으로 먹고 산다고? 네 그 많은 취미생활은 어떡할 건데?”
숨이 막혀오는 속삭임은 내 목소리였고 형상은 나의 얼굴이었다. 걱정이 또 다른 걱정을 낳고 크기를 부풀려 나를 잡아먹었다. 아, 인지치료에 사용하던 방법이 있었잖아. 생각 자르기, 스트레스 요법 때 사용하던 방법이 있었지, 그걸 써볼까. 머릿속에서 몰아내려 애를 써본들 숨은 더 가빠지기만 했다.
금요일 오후가 되었을 때, 서울로 올라가던 나의 심정은 도망을 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라.
“많이 써서 그래요. 피검사는 멀쩡해요.”
“제가, 제가 많이 아파서 그래요. 분명 마비가 왔는데… 지금도 손이 약간 떨려요.”
“지나간 건 말하지 말라니까요. 멀쩡하잖아요. 류마티스 증상은 그런 식으로 안 와요. 루푸스 환자들은 성격들이 다 왜 그런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 해결이 될 줄 알았는데 해결은커녕 내 착각이고, 엄살이었다는 의사의 단호한 말에 더 할 말이 없었다. 루푸스 환자들은 다 유난을 떨고, 엄살을 피운단다. 그런 건가. 내가 루푸스 환자라서 그런 건가. 저 사람은 나 같은 루푸스 환자들을 많이 만나봤으니까 더 잘 아는 걸까. 내 고통은 엄살인 걸까. 하지만 분명 내 손가락이 안 움직였어요.
토요일 오전, 일찌감치 달려갔던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동생은 친구를 만나러 갔고 집 안은 적막했다. 불을 켜지 않았고 블라인드가 쳐진 집 안은 어두웠다. 멍하게 서 있다가 약봉투를 현관문 앞에 떨구고 블라인드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평생 엄살을 부리며 살게 될까. 남들이 이해 못 할 아픔을 혼자 아프다고 외치다가 알아달라고, 누군가 알아주면 안 되겠느냐고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하게 될까.
내가 만나는 환자들 중에는 지친 보호자를 가진 환자들이 많았다. 아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면, 보호자들은 저도 모르게 아프다는 말에 둔감해지고는 했다. 그 사람은 어제도 아팠고, 오늘도 아프고, 내일도 아플 테니까.
아픈 사람에게는 나의 아픔을 이야기하기도 힘들다. 그 사람의 힘듦만 들어주어야 한다. 일방적인 쏟아냄만 받아주다 보면 애정이 바닥나버리기 일쑤다. 관계란 양방향이어야 하는데 그게 참 힘들다. 처음엔 참 많이 사랑하고, 지금도 사랑하는데, 피로와 지침이 덕지덕지 쌓이다 보니 사랑이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고는 한다.
나는 그게 참 무서웠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내가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파요. 힘들어요. 그 말이 참 어려웠다. 앞으로도 그 말을 해야 할 날이 많을 것 같아서. 그때 그 사람들이 또?라는 말을 하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았다.
블라인드를 내리는 줄이 보였다. 줄은 제법 튼튼해 보였다. 이게 과연 사람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걸까? 짧게 생각하며 줄을 잡고 몇 번 당겨 확인했다.
그런 나를 발견한 순간, 울음을 터트리며 집 주변의 정신과를 검색했다. 정신없이 전화를 걸었다.
“제가요, 제가 자살충동이 생겨서요. 저 좀 살려주시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