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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즈플 Sep 17. 2023

상실의 5단계

늑대물린여자 17



죽음과 관련한 사건을 경험하거나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사람은 상실감을 경험하고 자기 방어를 한다. 

자기 방어는 사람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다. 자연스러운 일이고 잘못되지도 않았다. 그런 과정이 없다면 사람은 스스로를 보호할 일차적인 수단이 없을 테니까.


병원균이나 바이러스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피부가 든든하게 외부와 내부를 구분 짓는 것처럼,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픈 사실과 피하고 싶은 말들로부터 나를 분리해야 한다.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에서 기초한 모델은 이제 범용적으로 사용되어 비단 주위 사람의 죽음뿐 아니라 다양한 정신적 슬픔이나 예상하지 못한 힘든 일에도 사용하고 있다.






숙제를 받았으니 하기는 해야겠지. 의사가 내준 숙제를 하기 위해 종이 한 장을 펼쳐두고 앉아서 펜을 돌렸다. 손가락 사이를 까딱거리는 펜을 보고 있다가 몰려오는 초조함으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충분히 잘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얼마 보지도 않은 제 3자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니 사춘기 반항심 같은 감정이 울컥울컥 치솟았다. 의사의 조언을 경청하고 받아들일 생각 따위 고려하지 않았다.



‘죽음의 5단계’. 익히 알고 있는 지식이었다. 누구나 상실을 경험하므로 나도 언젠가 이 5단계를 마주할 것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가 적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큰 병을 앓게 된 사람이 겪는 반응을 파악하기 좋은 이론이겠거니 하고 떠올라 종이에 끄적거린 참이었다.

‘부정 - 분노 - 협상 - 우울 - 수용’.

흰 종이에 다섯 글자를 막상 적어놓고 나서는 내게 적용하려 하는데, 내가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남을 바라볼 때엔 잘만 파악하던 단계들을 내게 들이대자 어찌나 어려운지.

간식으로 방에 가져온 비스킷만 혀를 씹듯 와그작와그작 씹어대며 애꿎은 펜 끝만 책상에 딱딱 부딪쳤다.


죽음의 5단계를 짧게 살펴보자면,

1단계는 부정이다. 인간은 고통에 취약하기 때문에 일단 부정함으로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지워버리고자 한다.

부정이라는 자기 방어기제는 나약하거나 병리적인 것이 아니다. 일각에서는 부정이라는 방어기제가 정상적이지 않다, 미성숙하다고 말하지만, 방어기제 자체만으로 정상과 병적임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위에서 말했듯 방어기제는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사자에게 일어난 다양한 고통을 인정하지 않는 부정은 심리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매는 한 번에 맞는 거라고? 그러다 사람이 아파 죽으면?

우리는 일단 부정을 하고 천천히 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고통으로 마주하는 것도 필요하다.


2단계는 분노이다. 상황을 서서히 인식하면서 사람은 고통을 주는 대상이나 원망할 대상에게 분노를 품게 된다.

정 대상이 없다면 하늘이나 신에게 분노를 품게 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 그 대상은 하늘이었다. 누군가 나를 때렸으면 모를까, 아무도 때리지 않았는데 병이 생겼던 터이니 미워할 대상이 신밖에 없었다. 


3단계는 협상이다. ‘만일’이라는 가설과 함께 후회를 하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우리는 이미 일은 벌어졌는데도 신이든 사람이든 무언가와 거래를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경감되거나 없어질 것이라고 여기고는 한다.  회유하고 싶고 같은 편에 서고 싶어 한다. 그럼 이 고통이 좀 덜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그러다가 내가 어떻게 살아오든 나쁜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비로소 우울이 찾아온다.

4단계인 우울은 사람의 발목을 슬픔의 바닷속으로 잡아 끌어내린다. 삶이 무가치하다고 속삭인다. 슬픔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계속된다는 느낌이 든다.

우울은 받아들임의 다른 표현이다. 그전 단계의 반응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상황이 되돌아갈 수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믿음으로 나오는 행동들이지만, 우울은 이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나오는 우울감이다.


충분한 우울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마지막 단계인 수용에 접어든다.

수용은 변한 현실을 비로소 받아들이고 몇 번이고 바뀔 미래에 발맞추어 자신도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우울감이 완전히 사라지지도, 과거를 잊어버리는 과정도 아니다. 놓아줌이다.

우리는 공기 속에, 물속에, 추억 속에 과거를 놓아주고 치유한다.



지금까지 글을 본 여러분은 내가 어느 단계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는가?

지금에 와서 과거를 돌아보면 이제 막 분노와 협상을 넘나드는 단계에 불과했으나 그 당시의 나는 수용에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루푸스를 받아들였다!’

‘그 의사는… 돌팔이다…!’


그는 돌팔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일 년이 넘도록 자신의 병 하나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이 되는 셈이니까. 그런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했다.

나는 언제나 강해야 하고, 똑 부러진 사람이어야 하는데 나약한 자신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정신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약을 꾸준히 먹지 않거나 외래진료를 중간부터 오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당시에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내가 그렇게 도망치게 생겼다. 나는 화장실에 볼일을 보고 급하게 모래를 덮는 고양이처럼 합리화에 합리화를 덮어씌웠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나와 더 잘 맞는 의사를 찾아가는 거야. 이건 합리적인 거야. 라면서 다른 정신과에 예약했다. 다른 정신과에서는 전의 병원처럼 나의 병력을 자세히 묻지 않았고 짧은 병력만 듣고는 불면증 처방을 내렸다. 새로운 의사의 익숙한 처방에 고개를 끄덕이며 밖을 나왔다.


그럼 그렇지. 불면증이 심해서 일시적으로 우울감이 찾아온 거였구나.



따끔, 따끔,

루푸스를 제대로 마주했나요?

분명 다 잘 해결됐는데. 처음 진단받은 곳 의사 선생님의 물음이 뾰족하게 내 마음속을 굴러다녔다. 


따끔, 따끔,


따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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