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뱀파이어 병인지 늑대인간 병인지
"암막커튼의 암막이 잘 되려면 짙은 회색이나 검은색으로 골라야 해요."
제 입이 반틈은 튀어나왔습니다. 아이보리나 하얀색을 좋아해서 제 방의 중심 컬러는 화이트와 밝은 오크입니다. 자연스러운 나무색상과 화이트로 꾸며놓은 스위트룸에 검은색 커튼이라니. 좌절하는 제 옆에서 동생이 다른 색은 안 되나요?라고 물어봐 주었습니다. 단호하게 커튼집주인이 고개를 젓습니다.
"암막커튼이라고 해도 밝은 색은 햇빛이 다 새어 들어오거든요. 그런데 이 정도 햇빛은 들어오는 게 오히려 예쁜데... 암막을 꼭 백프로로 하셔야 해요?"
"아...."
여기서 또 일일이 루푸스 얘기를 설명하기도 그렇지요. 동생과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다가 결국 디자인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화이트와 베이지색의 배색. 마음에 쏙 들어요. 그러나 막상 커튼 주문을 마치고 나오자 걱정이 됩니다. 괜찮을까요?
왜 이렇게 햇빛에 예민하게 구느냐 하면 루푸스 환자는 자외선(UV)에 예민한 종족이기 때문입니다.
광과민성은 60~100프로의 환자라고 표현할 정도로 대부분의 루푸스 환자들이 갖고 있는 특징적인 증상 중 하나입니다. 갑자기 환자의 루푸스 활성도가 높아지면 의사들은 이렇게 물을 정도입니다.
"혹시 요즘 햇빛 쐬었나요?"
'햇빛을 쐬면 면역반응이 항진된다.' 이 건강 원칙이 루푸스 환자에게는 어떻게 적용될까요. 루푸스를 치료하는 수많은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첫 번째 치료법으로 자외선을 피하라고 권고합니다. 면역반응이 항진되면 루푸스의 활성도가 올라가므로 당연스러운 충고입니다.
천의 질병인 루푸스 환자들답게 햇빛을 쐬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열감과 발진을 호소하기도, 두통을 호소하기도 하며, 햇빛을 맞으면 힘이 빠지고 피로를 호소하다가 너무 피곤해 졸음이 쏟아진다고 말하는 환자들도 있습니다.
즉각적이든 아니든 햇빛은 루푸스 자체를 활성화시킵니다. 이 정도로 햇빛과 상극인 탓에 어떤 루푸스 환자들은 차도르를 두르듯 온몸에 검은 천이라도 두르고 다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햇빛을 아예 피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먹고사니즘이 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햇빛을 쐬지 않으면 우리 몸의 필수 영양소인 비타민 D 합성이 또 문제입니다. 골다공증이 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이지요.
햇빛을 피하기 위해 선크림만 바르면 될까요? 모자를 써야 하나? 자외선을 막아야 한다고는 하지만 아무도 어디까지 막아야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어디까지 자외선을 막아야 하는 거지?
혼란스럽습니다. 햇빛을 피해 관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인가 봅니다. 이제 보니 늑대에게 물린 게 아니라 뱀파이어에게 물린 게 틀림없습니다. 스테로이드를 오래 먹어 얇아진 피부막으로 팔다리에 새파란 핏줄이 비치는 게 뱀파이어에 더욱 가까운 인상이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외국의 논문과 외국 환자 커뮤니티를 살피어도 환자들마다 말이 다릅니다. 한 서울대 의사는 실내에서도 자외선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선크림을 파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속의 이야기들은 공포에 공포를 먹고 자랍니다. 햇빛을 쬐면 고통이 심해져 집 안에서 나가지를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인터넷을 서핑할수록 몸이 더욱 아파지는 것 같고, 창문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 무섭습니다. 두렵습니다.
왜 대학병원에 처음 갔을 때 나누어준 책자에서 '인터넷에 떠도는 말들에 너무 휘둘리지 마라.'라는 말이 쓰여 있었는지 이해가 갑니다. 루푸스는 예기불안 (자신에게 어떤 상황이 다가온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생기는 불안)이 생기기 십상입니다. 한번 아파본 사람들이고, 그 통증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의 방법은 대놓고 물어보는 겁니다. 저를 진찰해 주는 의사에게요.
진료를 해주는 의사 선생님에게 인터넷 속에서 자외선을 어느 정도 차단하라고 하는지 다 다르게 말해 혼란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더불어 이사 간 집의 채광이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들처럼 자외선 차단 필름을 붙여야 하나 고민된다는 말도요.
주치의는 이렇게 설명해 주더군요.
1. 자외선 차단제는 외부에 나갈 때 바르는 것이 좋다.
2. 해가 강한 정오 시간 때에는 양산으로 물리적 차단을 하는 것이 좋다.
3. 여름에는 긴 팔옷으로 자외선 차단을 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1. 자외선을 백 프로 차단한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받는 자외선이 없어 생기는 골다공증이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2. 해가 있는 동안 움직이지 않아 근육이 약화된다면 그로 인해 몸이 굳는 게 더 안 좋다.
3. 자외선보다 스트레스가 더 루푸스에 치명적이다. 불안과 스트레스에 잘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치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여름에 비키니 입고 바다로 뛰어듭니까? 한겨울에 선크림 안 바르고 스키장에 가서 놀 거예요? 그런 거 아니라면 어느 정도 일상생활에서 받는 자외선은 괜찮아요. 치료를 안 받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꾸준히 약 잘 먹고 진료받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자외선으로 너무 스트레스받기보다 좀 더 건강한 생활을 하는 걸 우선하세요."
물론 햇볕을 피할 수 있다면 좋습니다. 루푸스 환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하지만 그것에 신경 쓰느라 정작 더 중요한 제 삶에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저는 뱀파이어가 아니라 인간인데요.
저는 여전히 선크림을 두세 개씩 갖고 있고 양산도 씁니다. 하지만 지금은 낮에 나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날이 좋을 때는 방 환기도 자주 합니다. 햇빛이 들이치는 방 안에서 조금 비껴 앉아 책을 읽고 있자면 기분이 좋습니다. 가끔 해를 많이 쬔 날에는 손가락이 욱신거리지만 너무 스트레스받지 않고 파라핀 배스에 손을 담급니다.
제 적은 햇빛보다 스트레스라고 생각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