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 아기, 난생 첫 TV시청은 임영웅 콘서트

by 훈남아빠

아기를 만나기 전부터 와이프와 서로 확고하게 다짐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매체는 보여주지 말자.'였다.

분명 어려운 길이 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건 가능한 지키기로 서로 다독였다. 현재까지 아기가 식당이나 병원 같은 곳에서 우연히 TV를 접한 것 말고 집에서 TV를 본 것은 딱 두 번이다. 두 번째는 이대호 선수의 은퇴 경기 일부이고, 첫 시작은 이러했다.



장모님은 살면서 어떤 연예인을 크게 좋아하신 적이 없다고 분명 나에게 말씀하셨었다.

"연예인들 뭐.. 내가 이 나이에 좋아할 게 있나?"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처갓집을 가면 자꾸 집에서 가수 임영웅의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임영웅이 서서히 장모님께 스며들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임영웅을 부르는 어머님의 표현이 "우리 영웅이가"로 바뀌었다.

나는 장모님께 "아니 어머님 언제부터 임영웅 씨가 아니고 임영웅도 아니고 우리 영웅이에요?" 라며 시기 가득한 말을 해댔으나 장모님은 그저 웃고 마셨다.



심지어 임영웅의 달력을 가지고 싶다고 하셔서 임영웅 달력을 찾아서 사드렸다. 그런데 그 이후로 달력을 너무 좋아하시기에 "임영웅 굿즈 사드릴까요?" 했더니,

"에이 뭐 그런 데에 돈을 쓰나.. " 하시고는 잠시 후에

"뭐가 있는데..?" 하시는 게 아닌가.

이건 사실 내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그래서 장모님에게 커다란 임영웅 인형과 작은 임영웅 사진이 들어간 컵을 사다 드렸다. 그랬더니 소녀 같은 표정을 하시며 기뻐하시는 게 아닌가. 세상에.. 나는 효도가 이렇게 쉬운 일인지 몰랐다.



그쯤 되니 사위로서 위기감이 들기 시작했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데, 나만 "우리 사위"로서 "우리"의 굳건한 위치를 차지한 줄 알았다. 그런데 임영웅이 “우리 영웅이"가 되더니 이제는 나랑 와이프, 아기 사진만큼이나 임영웅 굿즈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머님 사위가 잘생겼어요? 우리 영웅이가 잘생겼어요?" 하고 묻자 어머님은 후다닥 자리를 피하며 대답을 회피하셨다.

"아니 어머님 우리 영웅이는 지금 콘서트 투어 다니는 중이고 저는 지금 어머님 바로 앞에 있잖아요?"라고 재차 물었으나 대답을 피하셨다.



아무튼 그렇게 장모님이 임영웅에게 빠져드시곤, 어느 날 티*에서 임영웅 콘서트를 라이브로 중계해 준다고 했다. 이번엔 장모님의 대답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으나, 형식적으로 여쭤는 봤다.

"어머님 코로나 걱정되신다고 임영웅 콘서트 보내드리지도 못했는데, 이번에 티*에서 라이브로 콘서트

중계해 준대요. 댁에 노트북 들고 가서 TV연결해서 같이 볼까요?"

장모님은 아주 기뻐하셨다. 그 길로 티* 구독권을 결제하고 노트북을 챙겨서 온 가족이 처잣집으로 향했다.



임영웅 콘서트가 오후에 진행했으므로, 아기를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그리 역동적이지 않은 화면이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 아기 녀석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라고 애써 생각하며 함께 콘서트 영상을 봤다. 10개월 아기가 난생처음으로 TV를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기는 장난으로 TV 맞은편 방향으로 몸을 돌려놔도 목을 돌려서 TV를 봤다. 내가 아기 얼굴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까꿍"을 외치자 한 손으로 거세게 내 얼굴을 치워버리고 임영웅을 콘서트를 봤다. 심지어 임영웅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 갑자기 슬며시 미소를 띠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나를 볼 때 화난 앵그리버드처럼 눈썹을 추켜올리는 아기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장모님, 와이프, 딸까지 세 여자가 TV 앞에 쪼르륵 앉아 그 매력이 넘치는 남자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모습을 멀찍이 소파에 앉아 쓸쓸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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