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인 강함에 매료되다.

킥복싱, 무엇보다 솔직하고 명료한 세계

by 훈남아빠

저녁 시간에 회원들이 다 가고 나면 형님과 단 둘이 운동을 자주 했다. 넓은 체육관에 불 하나만 남겨 놓고 남은 불은 모두 끄고 운동을 했다. 형님은 체육관에 코치이기도 했지만, 체육관의 대표선수였다. 평상시에 코치로서 보낼 때는 눈웃음을 띠며 장난도 치고 분위기를 가볍게 풀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개인 운동할 때가 되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웃음기는 완전히 사라졌고 눈빛은 사나웠으며 조명 아래서 광대 밑에 그늘이 지면서 굉장히 사나운 맹수처럼 보였다.


나는 당시에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소설책에 심취해 있었다. 그 책에서는 사람들이 외모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외모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란 게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 부분을 보고 잠시 충격으로 얼얼했다. 생각해 보면 참 사람이란 건 별 게 없는 거 같았다. 어떤 사람은 굉장히 위대해 보이고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은 거기서 거기일 뿐. 사람과 사람을 구분 짓는 대단한 특징은 없는 것 아닐까? 사람은 다들 작은 차이에 요란하게 굴뿐, 사실은 거의 거기서 거기인 게 아닐까.




그래서인지 그때는 오히려 운동이 굉장히 솔직하고 명료해 보였다. 신체 형태는 불공평하게 태어났지만 일정 수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겪어야 했을 그 순간순간들의 고통은 평등하다. 그 고통의 순간들이 얼마나 중첩되었느냐에 따라 승패도 명확하다. 그리고 그 순간순간의 고통들로 조각된 신체가 앞에 있었다. 나는 그 순수한 강함에 압도되었다. 킥복싱을 1년 정도 수련해 온 나지만, 형님의 킥을 잡아주면 두툼한 킥판을 뚫고 들어오는 짜릿한 고통에 팔이 떨릴 정도였다. 내 허벅지에 로우킥을 전력을 다하지 않고 툭 차도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의 파괴적인 힘이었다.


그런 압도적인 힘에 매료되었으나 오히려 그걸 좇기에는 너무 아득해 보였다. 이 형님은 보통 정신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기준에서 보면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 나름의 속도로 운동을 하다가, 시험을 준비하다가, 학교 활동을 좀 하다가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고 어느새 형님의 대회날이 다가왔다. 형님의 대회가 다가오자 나는 내 경기도 아니면서 내가 오히려 초조하고 긴장됐다. 그런데 형님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그저 운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관장님도 그냥 늘 덤덤한 무표정 그 자체여서 체육관의 분위기도 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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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대회 당일이 되었고 나는 한동안 시험 준비를 하느라 체육관을 가지도 못하다가 부랴부랴 대회장으로 향했다. 형님의 경기는 가장 메인 경기로 여러 경기 중 가장 마지막 경기였다. 신인 선수의 경기들이 개막전을 열었다. 분위기는 점차 뜨거워졌고 드디어 형님의 경기 순서가 되었다. 관장님은 역시나 무표정이었고 형님도 전혀 긴장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 사람들은 정말 긴장하는 감각이 마비된 사람들인가?'


그런데 잠시 후 경기에서 이 두 사람이 왜 이렇게 덤덤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분명 마지막 경기는 챔피언 결정전으로 중요한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승부 자체가 되지 않는 경기였다. 형님은 일부러 다리를 몇 대 맞아주며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반면에 형님의 로우킥이 정확하게 꽂힐 때마다 상대측은 몸이 크게 휘청였다.


1라운드가 끝나자 누가 봐도 분위기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상대는 하체를 조금씩 절뚝이고 있었고 형님은 굳건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상대는 더 이상 경기를 진행할 수 없었다. 링에 쓰러져서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심판은 승리를 선언했으며, 잠시 후 형님의 한 팔을 높게 들어 올렸다. 형님은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관객석보다 높이 올라가 있는 스파링 위에 쏟아지는 주황색 조명 아래에 형님의 존재감은 정말 강렬했다. 그 근육들 하나하나 아래에는 조명으로 인해 두꺼운 명암이 들어서 있었다. 저 압도적인 강함, 그 아래에는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고통의 길들이 길게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형님은 움직이지 않는 산처럼 거대해 보였다. 나는 다시 한번 압도적인 강함에 매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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