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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아플 땐 미술관

아름다움은 때때로, 말보다 더 깊은 위로가 됩니다

by papamoon

살다 보면 머리가 아픈 날이 있습니다.

단순히 두통이라는 증상보다, 무언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엉켜버린 실타래가 머릿속까지 퍼져 나오는 듯한 그런 날 말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버겁고, 뉴스 속 세상은 시끄럽고, 내 마음조차 낯설게 느껴질 때. 그런 날이면 저는 조용히 미술관으로 향합니다.


미술관의 문을 조용히 밀고 들어서는 순간, 마치 오래된 숨결 하나를 내쉬듯 새로운 공기가 가슴에 스며듭니다. 바깥의 소음은 문틈 밖에 잠시 머물고, 안으로 들어선 저는 고요와 마주합니다. 그 고요는 단순한 적막이 아니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의 너그러움입니다. 말보다 이미지가 먼저 말을 거는 풍경. 색채와 형태, 붓의 흔적과 여백들이 각자의 언어로 속삭이는 곳. 그 안에서 저는 천천히 긴장을 풀고, 내면의 소음을 잠재웁니다.


그림 한 점, 조각 하나가 어떻게 위로가 될 수 있느냐고 의아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확신을 담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아름다움이 사람을 살립니다.”

아름다움은 설명이 필요 없는 언어입니다. 그것은 가르치려 들지 않고, 그저 존재함으로써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미술관은 때때로 병원을 대신합니다.

진단 없이도 나를 어루만지고, 처방 없이도 나를 고쳐주는 공간. 우리는 그 안에서 타인의 고백을 읽고, 낯선 형상을 통해 오히려 나 자신을 다시 발견합니다. 어떤 말보다 명확하게, 어떤 침묵보다 따뜻하게 우리를 향해 열려 있는 곳이지요.


예술 감상에는 여러 이론이 존재합니다. 에드먼드 펠드먼의 네 단계 감상법, 파노프스키의 세 층위 해석법처럼 작품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익한 길잡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들을 알지 못해도 전혀 괜찮다고요. 감동은 언제나 지식보다 먼저 가슴에 닿기 때문입니다. 예술은 이해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모른다’는 상태 자체가 우리를 더 섬세하게 감응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림은 하나의 문장처럼, 혹은 한 편의 시처럼 다가옵니다. 누군가에겐 고백이고, 누군가에겐 회복이지요. 김환기의 푸른 점들이 가득한 화면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고요한 우주의 숨결을 느끼며 스스로의 존재를 가만히 되짚게 됩니다. 유영국의 강인한 색채와 형태는 한없이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삶의 긴장은 오히려 더 깊이 다가옵니다. 박수근의 소박한 인물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눈빛과 손끝은 그 시대의 고단한 품을 담아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익숙하고도 낯선 장면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기억을 발견하고, 또 그 기억 안에서 위로받습니다.


작품은 정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안의 질문을 끌어올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정직하게 묻습니다.
“지금, 당신은 괜찮으신가요?”

세상은 늘 설명을 요구합니다. 이유를 대야 하고, 결과를 내야 하고, 의미를 밝혀야 하죠. 하지만 예술은 다릅니다. 예술은 감각을 허락합니다. 논리보다는 직관을, 완성보다는 여운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저는 믿습니다. 예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인간적인 안식처라고.

우리는 작품 앞에 설 때, 비로소 침묵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조용히 가라앉고, 말없이 공감받는 기분에 안도하게 됩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저에게 미술관은 감상의 장소가 아니라, 회복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마치 마음에 깊게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듯, 저는 그곳에서 내면을 다시 빛 속에 세웁니다. 한 점의 그림, 하나의 조각, 한 줄의 문장도 없는 여백 앞에서, 오히려 가장 많은 위로를 받곤 합니다. 세상이 복잡하고 마음이 시끄러울수록, 저는 그곳으로 향합니다. 익숙한 풍경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꼭 알아야 하는 작가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거기서 멈춰 서 있다는 사실 하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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