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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우리 동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은 동네에 산다는 것

by papamoon

서울은 수직으로 자라는 도시입니다.

유리와 철근으로 빚어진 빌딩들이 서로의 어깨를 밀치며 하늘을 차지하려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 휘황한 첨탑들 아래, 마치 숨을 고르듯 고요히 누운 동네가 있습니다.

시간의 물기를 머금은 돌담이 있고, 계절마다 결이 다른 소리를 내는 흙길이 있으며, 담장 아래 수줍게 피어난 제비꽃이 작은 숨결로 하루를 지키는 곳. 저는 지금,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이름도 다정한, 성북동입니다.


처음 이 동네를 만난 건 봄날의 산책길에서였습니다.

복사꽃이 환하게 피어 있던 골목을 걷다가 낡은 담벼락과 오래된 나무들을 마주쳤습니다. 그때 바람은 아주 천천히 지나가며, 잎사귀 하나하나를 흔들었고 저는 그 조용한 흔들림 속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평온함을 느꼈습니다. 풍경이 먼저 말을 걸어오던, 그런 오후였습니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여기는 스쳐가는 길목이 아니라, 내가 마음을 두고 오래 살아도 좋은 곳이겠구나.


성북동에 살기로 한 건 충동이 아니라, 다짐에 가까웠습니다.

스무 해 넘게 일하며 아껴 모은 돈으로 이곳에 조용하고 단정한 집을 마련했습니다. 아침이면 햇살이 큰 창을 가득 채우고 옆집 강아지도 제 발소리를 기억해 주는 참 편안하고 다정한 집입니다.


이 집에 살며 제 삶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편의점 사장님은 유행하는 품절 아이템이 들어오면 따로 챙겨놨다가 슬며시 건네주시고, 국수집 이모님과는 반가운 눈인사를 나눕니다. 미장원 원장님은 제 머리를 다듬으며 우리 집 아이들과 와이프의 안부를 다정히 물어 보시고, 동네 빵집에선 갓 대학생이 된 딸아이가 초등학교 반 친구 인연으로 덤으로 빵을 받아오는 날이 많습니다. 많은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서로의 하루를 짐작할 수 있는 사이. 이 동네에는 그런 조용한 정이, 소리 없이 오갑니다.


성북동은 여러 시대가 포개어진 곳입니다.

조선 영조 때, 이인좌의 난 이후 성저십리에 군사 농장이 세워지며 사람들의 삶이 이 골짜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복사골이라 불리며 복숭아나무가 심어졌고, 언젠가부터 시인과 예술가들이 이곳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성북동의 공기엔 알 수 없는 서정이 가득합니다. 조용하고 느린, 그러나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결이 있습니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이 지은 집입니다.

그는 일본 총독부를 등지기 위해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앉혔지요. 그 고집과 의지가 아직도 담장 너머로 느껴집니다. 길상사에는 사랑과 무소유의 철학이 머물고, 수연산방에는 이태준의 묵직한 나무가 서 있으며, 옛돌박물관의 석상들에선 사람보다 오래된 침묵이 흘러나옵니다. 성북동은 말없는 것들이 문득 말을 걸어오는, 그런 순간이 잦은 곳입니다. 이 동네의 골목은 오래된 책장이자, 잊고 있던 앨범이며, 작은 박물관이기도 합니다. 걸음을 옮기다 보면 고즈넉한 풍경이 어느새 마음 깊은 기억과 닿아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저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그 자리에 잠시 머뭅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결국, 이렇듯 아무 말 없는 장소에서 더 깊이 피어나는 법이니까요.


저는 성북동을 조용히, 그러나 깊이 사랑합니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마음속에서 매일 자라고 있는 그런 사랑입니다. 김광섭 시인은 「성북동 비둘기」에서 “나는 성북동에 와서 비로소 가난한 사람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곳에 살며, 비로소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성북동에 산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들과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도시는 갈수록 속도를 높이지만, 이 동네는 언제나 한 박자 늦게 걷습니다. 느티나무는 해마다 키를 키우고, 담벼락의 담쟁이는 계절만큼 자라납니다. 저 또한 그렇게, 성북동의 시간에 맞춰 조용히 나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이 골목 어귀에서 마주치는 모든 ‘안녕’에게 조심스레 고개를 숙입니다. 이곳에서의 삶이 매일, 저를 조금씩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듯하여 자꾸만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성북동을 쉽게 떠나지 못하리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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