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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국밥을 좋아해

삶을 데워주는 한 그릇의 풍경

by papamoon

저는 국밥을 좋아합니다.

그저 ‘좋아한다’는 말로는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밥은 어느덧 제 안에 조용히 뿌리내린 하나의 풍경이 되었고, 습관이 되었으며, 마음 한켠을 데워주는 오래된 온기처럼 느껴집니다.


어릴 적부터 즐겨 먹긴 했습니다만, 나이를 먹을수록 그 애정은 더 깊어졌습니다.

단순히 맛있고 든든하다는 차원을 넘어, 국밥이라는 음식을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되었고, 그만큼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마치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쳤을 때, 미처 보지 못했던 문장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국밥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로운 감각을 불러오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허름한 국밥집구석에서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며 국밥을 드시던 어른들을 보면 괜히 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고, 한쪽 어깨가 조금은 내려앉은 듯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모습조차 묘하게 근사하게 보입니다. 말없이 뚝배기 앞에 앉아 자신의 속도대로 숟가락을 드는 그 자세는, 마치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켜온 연구자가 조용히 탐구를 이어가는 듯 느껴집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입맛과 기분에 집중하는 모습이 너무도 멋있어 보입니다. 그분들은 누구보다 충실히 하루를 살아내신 분들입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조용히 자기 삶의 속도를 지켜가는 분들이지요. 국밥은 그런 분들의 곁을 늘 조용히 지켜주는 음식 같습니다. 뜨겁지만 조급하지 않고, 소박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그냥 거기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깊은 위로가 되는 그런 음식처럼요.


국밥은 한 숟가락으로는 다 알 수 없는 음식입니다.

그 깊이는 오직 시간 속에서, 천천히 드러납니다. 젊을 땐 무심히 넘기던 국물의 여운이, 요즘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첫 숟가락에는 뜨거운 온기가 스며 있고, 두 번째엔 재료들이 어우러진 맛의 결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세 번째쯤, 비로소 긴 시간 동안 끓여낸 국물의 진심이 조용히 전해집니다.


저는 국밥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좋아합니다.

순댓국, 설렁탕, 육개장도 좋고, 콩나물국밥이나 시래기국밥도 참 반갑습니다. 그릇의 모양은 달라도, 그 안에는 늘 무언가 따뜻한 것이 담겨 있습니다. 오래도록 끓인 시간, 말없이 건네는 마음, 그리고 속을 속이지 않겠다는 다소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태도 같은 것 말입니다.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괜찮고, 혼자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음식. 국밥은 그런 점에서도 본받고 싶은 음식입니다. 조용히, 그러나 정직하게 데워지는 맛. 마치 오래된 친구의 말투처럼 익숙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그 맛을 저는 좋아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돼지국밥은 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는 대부분 그렇겠지만, 저에겐 단지 고향의 음식이라기보다 삶 깊은 곳에 겹겹이 깃든 기억 같은 존재입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토렴 방식, 새우젓과 정구지, 다대기와 들깨가루를 어떻게 넣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맛의 결. 어릴 적부터 그런 국밥이 제 식탁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 하얀 국물 안에는 단순히 돼지뼈만 우러난 것이 아니라, 부산 사람들의 꾸밈없고 진실한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그리운 고향 냄새와 시장통의 소란, 삶의 수고와 인내가 모두 함께 담겨 있지요.

그런 온기가 제 안에도 스며들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서울살이를 막 시작했을 무렵, 아직 모든 것이 낯설고 긴장으로 가득 차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돼지뼈를 고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저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복잡했던 감정이 그 냄새 하나에 조용히 풀어졌습니다. 눈물이 나진 않았지만, 가슴 한켠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고향이라는 것은 반드시 지리적 장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날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냄새일 수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 냄새는 시간과 거리를 뛰어넘어 우리를 다시 그곳으로 데려가는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요. 그날 이후, 저는 서울에서도 돼지국밥집을 찾아다녔습니다. 고향의 맛을 완벽히 재현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 비슷한 온기만으로도 마음이 충분히 따뜻해졌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확한 재현이 아니라, 그 마음을 이해하고 기억하려는 태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밥집은 대개 도시의 가장자리나 오래된 시장 근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국물을 지키는 주인장과, 묵묵히 하루를 마친 손님이 마주 앉은 풍경. 그곳에서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됩니다. 뜨거운 뚝배기 하나면, 그날 하루를 무사히 건너왔다는 것을 서로가 아는 듯합니다. 국밥 한 그릇 안에는 주인장의 부지런함도, 손님의 고단함도 함께 녹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그 자리에선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실입니다. 양복 입은 직장인도, 작업복 입은 노동자도, 혼자 온 이도, 친구들과 함께 온 이도, 모두 같은 뚝배기 앞에 앉아 같은 온기를 나눕니다. 국밥이 가진 조용한 연대의 힘은 아마도 이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밥이 좋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고, 눈에 띄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묵묵히 곁을 지키는 음식. 오래 끓인 진심 같은 음식. 정교한 요리도 훌륭하지만, 어떤 날에는 그런 소박한 한 그릇이 더 깊고 진한 위로가 되어줍니다. 국밥은 제게 삶의 동반자 같은 음식입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지쳤을 때도 늘 그 자리에 있는 친구처럼요. 변하지 않는 맛과 온기로, 언제나 같은 위로를 건네는 그런 음식입니다.


오늘도 저는 국밥이 좋습니다.

아마 내일도, 그다음 날도, 익숙한 그릇 앞에 앉아 조용히 뚝배기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좋아하는 것을 오래도록 좋아하며 살아가는 삶,

그리고 언젠가 그 좋아하는 것과 조금씩 닮아가는 삶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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