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뉴욕공립도서관과 크롬하츠

12월 31일 (수) | 뉴욕공립도서관, 하이라인, 탑 오브 더 락

by papamoon

오늘 아침은 평소보다 조금 서둘러 타임스퀘어 광장으로 나갔습니다.

오후가 되면 볼드랍 행사로 발 디딜 틈도 없을, 한 해의 마지막 날의 타임스퀘어 광장이 내뿜는 그 특유의 에너지를 미리 눈에 담아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숙소가 미드타운이라 명소들이 가깝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적이 드문 이른 아침의 광장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습니다. 한국에서도 새벽 산책을 즐기던 습관이 이곳 뉴욕에서도 저를 부지런히 움직이게 합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뉴욕공립도서관(SNFL)이 일찍 문 연 것을 보았습니다. 연말이라 그런지 아침 8시부터 운영한다는 안내가 반가웠습니다. 평소 도서관 가는 것을 워낙 좋아하는 터라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조용한 실내에서 여러 잡지들을 둘러보다가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았습니다. 여행객인데 기념품으로 도서관 카드를 만들 수 있는지 묻자, 직원은 흔쾌히 웃으며 안내해 주었습니다. 도서관 카드에는 ‘Knowledge is Power(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한 해의 끝자락, 그중에서도 이른 아침시간,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니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이 거대한 도시를 지탱하는 진짜 저력은 화려한 타임스퀘어의 전광판이 아니라, 이런 도서관과 같은 성실한 일상의 시간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저 또한 그들의 조용한 열기에 슬쩍 동참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묵직한 가르침이 담긴 카드 한 장이 그 어떤 화려한 기념품보다 든든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늘 만든 뉴욕공립도서관 카드 © 문현호



오전에는 시은이와 함께 ‘크롬하츠’ 매장으로 향했습니다. 평소 물욕이 별로 없는 아이인데, 이번 여행에서 꼭 사고 싶은 게 있다며 집업 후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한국에서는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도 몇 배나 비싸다는 말에, 어제 아내와 상의 끝에 큰맘 먹고 사주기로 약속했었습니다. 매장 앞에 도착하니 벌써부터 줄이 길었습니다. 11시가 되자 시큐리티 가드가 예약을 확인하고 차례로 입장을 시켰습니다. 마치 입국 심사라도 하듯 여권을 검사하는 상황이 조금 우습기도 했지만, 딸아이의 설렘을 위해 묵묵히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정작 들어선 매장 안에는 저희가 찾는 옷이 없었습니다. 모든 재고가 나갔다는 무심한 설명만 돌아왔습니다. 아빠로서 그 선물을 꼭 안겨주고 싶었던 저는 허탈한 마음이 앞섰는데, 시은이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저를 다독였습니다.

“아빠, 엄마가 어제 사주겠다고 했을 때 이미 너무 기뻤어. 그래서 오늘 옷을 못 사도 괜찮아. 이미 선물 받은 거나 다름없을 만큼 좋거든. 너무 비싸서 사실 계속 고민됐는데, 없으니까 내 마음이 오히려 훨씬 가벼워.”

딸아이의 그 한마디가 수십만 원짜리 명품 옷보다 훨씬 단단하고 예쁘게 들렸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시은이와 하이라인을 따라 베슬까지 걸었습니다. 다행히 크롬하츠 덕분인지 어제의 서먹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겨울 공기는 차가웠지만 탁 트인 풍경 속에서 아이와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하이라인을 걷는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오후에는 예약해 뒀던 탑 오브 더 락에 올라 2025년의 마지막 해넘이를 보았습니다. 어제 봤던 낮의 풍경과는 또 다른 묵직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야경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시은이는 한국에 있는 동생 예은이의 선물도 사야 한다며 저를 5번가로 이끌었습니다. 트와이스의 쯔위가 입어 유명해졌다는 빅토리아 시크릿 속옷을 선물하고 싶어 했습니다. 매장 안을 바쁘게 오가며 동생의 사이즈를 꼼꼼히 체크하고 선물을 고르는 언니의 뒷모습이 대견했습니다. 자매는 나이를 먹으며 서로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된다는 말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여정은 숙소 근처 길거리에서 먹은 ‘할랄가이즈’였습니다. 30분을 줄서서 받은 뜨거운 플래터를 들고 저희는 길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찬 바람을 맞으며 길 위에서 딸과 어깨를 맞대고 앉아 호호 불어가며 먹는 이 투박한 식사는, 이번 여행에서 맛본 그 어떤 요리보다 깊은 맛이 났습니다. 안락한 식당 대신 뉴욕의 공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나누는 이 식사야말로, 제가 시은이와 공유하고 싶었던 ‘진짜 뉴욕’의 조각이었습니다.

할랄가이즈 © 문현호


이제 곧 자정입니다. 타임스퀘어 쪽에서 전해지는 떠들썩한 공기가 숙소 근처까지 낮게 깔립니다. 딸아이의 손에 들려주고 싶었던 값비싼 쇼핑백은 없지만 마음은 묘하게 평온합니다. 주머니 속 도서관 카드 한 장과 길바닥에서 나누어 먹은 뜨거운 음식의 온기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연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 곁에서 자기만의 보폭으로 걸어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다시금 눈에 담아봅니다. 거창한 다짐보다는, 내일 아침에도 오늘처럼 아이와 나란히 걸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2025년의 마지막 밤이 이렇게 깊어갑니다.


P.S. 한국에 있는 독자분들은 이미 2026년을 살고 계시겠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아직 2025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2025년과 2026년 사이, 그 찰나의 순간에서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께 새해 인사를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꼭 건강하시고,
올 한 해 소원하시는 모든 일이 기적처럼 다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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