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딸과 함께 채운, 26년 뉴욕의 첫 페이지

1월 1일 (목) | 성 패트릭 대성당, MoMA 2차, 센트럴 파크

by papamoon

2026년 1월 1일. 새해 첫 아침이 뉴욕의 마천루 사이로 투명하게 내려앉습니다.

어젯밤 시은이와 호텔 방 TV로 지켜보았던 타임스퀘어의 볼 드랍(Ball Drop). 도시를 집어삼킬 듯 포효하던 함성과 폭죽의 열기는 거짓말처럼 증발해 버렸습니다. 축제의 소란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거리는 낯설 만큼 고요합니다. 화려한 조명이 꺼진 자리에는 맑은 겨울 햇살이 대신 들어찼고, 도시는 그제야 편안한 숨을 고르며 다정한 새해 인사를 건네오는 듯합니다. 아직 여행의 피로가 남은 시은이에게는 늦은 아침잠을 선물하고, 저는 조용히 옷을 챙겨 입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호텔 문을 나서자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1월 1일의 공기. 날 선 겨울바람 속에 섞인 묘한 청량감이 ‘다시 시작’이라는 단어를 감각적으로 일깨워줍니다.


독실하다 말하기엔 부끄러운 신앙이지만, 한 해의 첫 페이지는 기도로 열고 싶었습니다.

문을 연 교회를 찾지 못해 헤매다 문득 지난 며칠 5번가를 오가며 보았던 거대한 첨탑을 떠올렸습니다.

‘성 패트릭 대성당(St. Patrick's Cathedral)’.

형식이 무엇이 중요할까요. 그저 간절함을 받아줄 품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육중한 청동 문을 밀고 들어갔습니다.

바깥세상의 소음이 칼로 자른 듯 차단된 내부엔 수백 년의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니, 지난 한 해 우리 가족을 별 탈 없이 지켜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가장 먼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고는 가장으로서 어깨에 얹고 있던 짐들을 조심스레 풀어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올 한 해도 건강하기를. 낯선 땅 캐나다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시은이가 씩씩하게 제 길을 걷기를. 그리고 대입이라는 큰 산을 마주한 우리 막내 예은이... 그 아이가 간절히 바라는 꿈에 무사히 닿을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저 자신을 위한 기도도 덧붙였습니다. 거센 파도 같은 직장 생활 속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흔들리지 않고 올 한 해도 묵묵히 버텨낼 힘을 달라고 말입니다. 종파가 다르면 어떻습니까. 가족을 위해 무릎 꿇은 아버지의 등 뒤로 쏟아지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은 그저 공평하고 따스할 뿐이었습니다.


26년 첫째날, 성 패트릭 대성당 © 문현호


기도로 마음을 비워낸 후, 영혼을 채우러 향한 곳은 MoMA(뉴욕 현대미술관)였습니다.

9시반, 미술관 문이 열리자마자 5층으로 발걸음을 옮긴 덕에,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모네의 <수련>을 마치 제 소유인 양 독점하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날의 절정은 4층, 마크 로스코의 방이었습니다. 텅 빈 공간, 거대한 캔버스 위로 번져나가는 노랗고 붉고 검은 색채의 덩어리. 타인의 시선 없이 오롯이 저 혼자 그 압도적인 색면(色面)과 마주했습니다. 그림과 나 사이에 어떤 방해도 없는 완벽한 ‘독대(獨對)’. 침묵 속에서 그림이 말을 걸어오는 듯한 그 전율은, 제가 새해 첫날 뉴욕에서 받은 가장 큰 위로였습니다.

26년 첫째날, MoMA © 문현호


점심 무렵, 잠에서 깬 시은이를 만나 센트럴 파크로 향했습니다.

빽빽한 빌딩 숲이 빈틈없이 포위한 맨해튼 한복판, 기적처럼 뚫린 이 거대한 녹지는 도시가 숨겨둔 가장 깊은 여백입니다. 우리는 장장 세 시간 동안 그 넓은 공원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습니다. 유명한 랜드마크를 찍고 오는 숙제 같은 관광은 내려두었습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서로의 새해 다짐을 이야기하고,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며 웃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시간. ‘도란도란’이라는 따뜻한 우리말이 차가운 뉴욕의 공기 사이로 스며들었습니다. 다 큰 딸아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이 평범한 시간이 주는 충만함. 그것은 그 어떤 화려한 볼거리보다 진한 행복감이었습니다.


저녁 메뉴는 시은이가 미리 찾아둔 차이나타운의 ‘YGF 마라탕’이었습니다.

사실 마라탕은 우리 부녀에게 꽤 사연 있는 음식입니다. 시은이가 유학을 떠나기 전엔 둘이서 종종 먹으러 다니곤 했는데, 아이가 유학을 떠난 뒤로는 통 먹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내는 향신료를 즐기지 않았고, 막내 예은이는 학원 스케줄로 늘 바빴으니까요.

“아빠, 이게 얼마 만이야? 진짜 맛있다, 그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붉은 국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딸이 환하게 웃습니다. 알싸하게 혀끝을 감도는 익숙한 자극. 어쩌면 그리웠던 건 마라탕의 맛이 아니라, 앞치마를 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맵다, 매워”를 연발하던 우리들의 그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떨어져 지내느라 한동안 잊고 살았던 우리 부녀만의 그 ‘단짝’ 같은 시간을, 뉴욕의 한구석에서 되찾은 기분입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빌딩 숲 사이로 유난히 휘영청 밝은 달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성당에서의 기도로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미술관의 명작들로 감성을 채우고, 센트럴 파크의 산책과 뜨끈한 마라탕 한 그릇으로 딸과의 온기를 꽉 채운 하루. 거창한 이벤트는 없었지만, 제가 사랑하는 것들로 빈틈없이 밀도 높았던 2026년의 첫 페이지가 이렇게 넘어갑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파랑새가 아니라, 딸아이와 함께 걷는 산책로 위 낙엽 속에, 그리고 함께 나눠 먹는 국물 속에 숨어 있는 것임을 저 밝은 달을 보며 다시금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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