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안녕 뉴욕, 그리고 또 잠시만 안녕 나의 딸

1월 2일 (금) | 월스트리트, 팁시상하이

by papamoon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 시은이는 여느 때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고, 저는 홀로 숙소를 나섰습니다.

뉴욕까지 와서 월스트리트(Wall Street)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으니까요. 이른 아침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부지런을 떤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돌진하는 황소상(Charging Bull)’ 앞에 긴 줄이 사라져 있었거든요.

미신인 걸 알면서도, 남들 다 한다는 그 의식을 치러봅니다. 황소의 뿔을, 그리고 거기를 단단히 움켜쥐어 봅니다.

혼자라 인증샷을 어쩌나 싶던 찰나, 마침 저처럼 혼자 여행 온 일본인 관광객이 눈에 띄었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여행자끼리의 눈빛은 통하는 법. 서로가 서로의 사진사가 되어 남겨준 그 사진 속 제 표정은, 진짜 부자가 된 사람처럼 넉넉해 보였습니다. 단순히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보다, 왠지 앞으로의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일본인 관광객분이 찍어주신 황소상 앞의 나 © 문현호


이어 발걸음을 옮긴 9/11 메모리얼. 거대한 부재의 공간 앞에서 잠시 들떴던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뉴욕이 품은 상실의 무게를 느끼며,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오후에는 다시 시은이와 합류해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했습니다. 바로 아내가 부탁한 미국에서 사야할 약들이 있는 쇼핑 리스트였지요. 쇼핑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흔쾌히 이 긴 휴가를 허락해 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 그 보답을 위해서라도 이 미션만큼은 반드시 완수하고 싶었습니다

타겟(Target)에서 트레이더 조(Trader Joe's), 그리고 CVS까지. 뉴욕의 마트와 드럭스토어를 순례하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양손 가득 무거운 장바구니가, 마치 아내에게 전하는 제 마음의 무게 같아 든든했습니다.


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저녁 식사. 시은이와 저는 주저 없이 ‘팁시 상하이(Tipsy Shanghai)’를 택했습니다.

이곳은 우리에게 단순한 맛집 이상의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지난 26일, 시은이가 아픈 몸을 털고 일어나 처음으로 찾았던 식당이거든요. 그날 창밖에는 눈이 펑펑 내렸고, 우리는 따뜻한 산라탕과 중국식 돼지갈비를 나누며 얼었던 몸과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때 느꼈던 그 안도감과 포근함이 너무도 좋았기에, 여행의 마지막 식사는 꼭 이곳이어야만 했습니다. 오늘은 메뉴판에도 없는 ‘동파육’을 조심스레 부탁드렸습니다. 지난번 맛본 갈비찜 소스가 워낙 기가 막혔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여쭤본 것이었지요. 주인 아주머니의 배려로 받아본 동파육은, 과장 조금 보태어 제 인생 최고의 맛이었습니다. 한국이나 본토 상해에서 먹었던 것보다 훌륭했으니까요. 따끈한 흰 쌀밥에 진득한 소스를 비벼 한 입 넣으니, 여행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튀긴 샤오롱바오와 국수까지, 식탁 위는 더할 나위 없는 풍요로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음식을 나누며 시은이에게 넌지시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아빠는 이번 2주가 정말 꿈같았어. 우리가 다시 이렇게 여행 올 수 있을까? 여행이 끝나는 게 너무 아쉽다.”

그리고는 덧붙였습니다.

“시은아, 원래 하나님은 초심자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대. 네가 아빠를 위해 기도해 주면, 어쩌면 아빠가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일할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

제 말에 딸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합니다.

“그럼 정말 좋겠다. 그렇게 되면 다음엔 엄마랑 예은이까지 다 같이 뉴욕 여행을 오자. 그때 우리 다시 여기 오자.”

딸과의 그 약속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우리의 대화를 알아들은 걸까요? 주인 아주머니가 서비스라며 건네신 아이스크림 한 스쿱이, 이 완벽한 식사의 달콤한 마침표가 되어주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남긴 구글리뷰 © 문현호


식사를 마치고 타임스퀘어와 5번가를 걷습니다. 지난 2주간 뻔질나게 드나든 덕에 이제 구글맵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골목골목이 훤한데, 이제 내일이면 떠나야 한다니 발걸음마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납니다.

과연 저는 다시 뉴욕에 올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초심자의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는데, 우리 시은이의 기도는 들어주실까요? 아니, 녀석이 정말 기도를 하긴 할까요? (웃음)


내일 아침 7시, 시은이는 토론토행 비행기에 오르고, 저는 12시에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공항에서 또 한 번 겪어야 할 이별이 벌써부터 마음을 아릿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번 이별은 슬픔만은 아닐 겁니다.

황소상 앞에서의 행운과, 팁시 상하이에서의 약속이 우리에겐 있으니까요. 언젠가 네 식구가 모두 함께 걷게 될 뉴욕의 거리를 상상하며, 아쉬운 짐 가방을 닫습니다.

안녕, 나의 뉴욕. 그리고 또 잠시만 안녕, 나의 딸 시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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