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귤래리티의 문턱에서 두 딸에게 쓰는 편지
JFK 공항 라운지는 생경할 만큼 고요했습니다. 지난 15박 16일, 뉴욕의 소음 속에서 내내 곁을 지키던 시은이를 다시 캐나다 학교로 보내고 홀로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 시끌벅적했던 여행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찾아온 것은, 쉰을 내일모레 앞둔 아빠가 마주한 적막한 공백이었습니다. 그 공백을 견디려 무심코 연 스마트폰 화면에서 일론 머스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텍사스 기가팩토리에서 진행된 어느 대담 영상이었습니다.
평소 AI 시대의 전환에 나름대로 대비해 왔다고 자부했지만, 그날 라운지에서 마주한 대담은 제 예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AI 시대의 보폭은 제 생각보다 훨씬 빨랐고, 그 영향력은 이미 제가 짐작하던 범위를 훌쩍 넘어서 있었습니다. 영상 속 인공지능은 이제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단계를 넘어, 인간 전문가의 전유물이었던 ‘안목’과 ‘판단’의 영역으로 이미 깊숙이 진입해 있었습니다. 숙련된 엔지니어가 평생을 바쳐야 얻을 수 있는 직관적 판단을 기계가 단 0.1초 만에 해내는 현실. 그것은 지능의 ‘민주화’라는 달콤한 수사보다는, 지능의 ‘가치 증발’이라는 서늘한 예고에 가까웠습니다. 6,000만 년 동안 켜켜이 쌓아온 인류 진화의 성벽이, 단 몇 년의 디지털 가속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력해지는 소리를 저는 JFK에서 들었습니다.
화면을 끄고 나니 질문들이 썰물처럼 밀려왔습니다. '나는 가장으로서 경제적으로 얼마나 더 유용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숙련도의 유효 기간은 얼마나 남은 걸까?' 그리고 그 끝에는 큰아이와 이제 곧 사회로 나갈 작은 아이의 얼굴이 겹쳐졌습니다.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는 대체 어떤 모습일까. 이 막연한 불안을 논리로 이겨내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륙 직전, 홀로 마주할 열다섯 시간의 비행을 위해 김대식 교수의 『AGI, 천사인가 악마인가?』를 서둘러 내려받았습니다.
구름 위를 나는 고립된 기내에서 책장을 넘기며, 저는 제가 가졌던 불안의 실체를 마주했습니다. 김대식 교수의 통찰에 따르면, 이제 지식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처럼 흔해진 ‘공공재’가 되었습니다. 지식이 흔해졌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지식만을 유일한 무기로 삼아 자존감을 세워온 우리 세대의 존재 근거가 희박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빠로서 저를 가장 깊이 고뇌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하는 두 딸의 미래입니다. 캐나다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는 큰아이, 그리고 미용이라는 구체적인 숙련의 길을 꿈꾸는 작은 아이. 아빠의 눈에 비친 아이들의 꿈은 소중하고 아름답지만, 동시에 시대의 거대한 파고 앞에서 위태로워 보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밑바닥부터 일을 배우며 ‘주니어’ 시기를 거쳐 전문가로 성장하던 ‘성장의 사다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기업들은 신입 사원을 가르쳐 쓰기보다 인공지능을 택합니다. 인공지능은 지치지 않고, 실수하지 않으며, 신입 사원 수천 명의 몫을 즉각적으로 해냅니다. 아이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마주할 세상은 이미 기계 지능이 인간의 평균적인 숙련도를 압도한 세상일 것입니다. 사다리가 끊긴 자리에서 시작해야 할 아이들에게, 아빠로서 나는 무엇을 준비하라고 말해줘야 할까요? 단순히 “열심히 해라”라는 말은 이제 무책임한 훈계가 되어버렸습니다.
비행기 안의 정적 속에서 저는 두 아이들이 걷게 될 ‘창작’과 ‘숙련’의 길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이제 인공지능은 창작의 과정에서 훌륭한 시뮬레이션 도구가 됩니다. 과거에는 리서치 작업에만 시간의 상당 부분을 썼다면, 이제는 인공지능을 통해 상상 속의 결과물을 미리 구현해 보고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경계가 발생합니다. 디자인과 같은 상업 예술은 '정답'이나 '효율'을 향해 가기에 인공지능이 상당 부분을 대체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다릅니다. 예술은 단순히 '편리하고 빠른 결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창작의 과정 그 자체에 인간의 즐거움과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아인슈타인급의 지능으로 우주의 원리를 수식으로 풀어낼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이번 뉴욕 여행에서 함께 보았던 빈센트 반 고흐가 캔버스 위에 쏟아부었던 그 지독한 고독과 고통을 직접 '느낄' 수는 없습니다. 인공지능에게는 아픔이 없기에, 그 고통을 뚫고 뿜어내는 인간 특유의 진정성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기술이 완벽해질수록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누가, 왜, 어떤 고통을 뚫고 이것을 만들었는가'를 묻게 될 것입니다. 화가의 거친 붓질 하나하나에 담긴 생의 의지는 기계가 복제할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입니다.
김대식 교수는 이 변화의 끝에 기다리는 사회 구조를 ‘기술 봉건주의(Techno-feudalism)’라고 경고합니다. 노동의 가치가 사라진 시대, 생산의 권력은 인간의 땀방울이 아니라 연산 능력과 자본을 독점한 극소수에게 집중됩니다. 노동의 가치는 뚝뚝 떨어지고 자본의 가치는 치솟습니다. 우리가 정치적 주권을 잃고 기계가 배분해 주는 배급에만 의존하게 된다면, 그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안락한 사육장일지도 모릅니다. 인공지능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우리를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길로만 안내하려 들 것입니다. 실패를 막기 위해 일탈을 통제하고, 건강을 위해 욕망을 거세하는 ‘완벽하게 관리되는 감옥’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때로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고, 뻔히 보이는 실패에도 몸을 던지며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입니다. 이 ‘불합리함’이야말로 기계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기계의 최적화된 명령에 저항할 ‘불합리할 권리’를 지켜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지막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능이 증발한 자리에 무엇이 남아야 할까요? 저는 이 질문의 답을 한국으로 돌아온 뒤 보았던 김대식 교수와 김혜연 안무가의 대담 중 나왔던 "뇌도 몸의 일부다"라는 명제에서 찾았습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영역, 바로 ‘신체적 경험’과 ‘감각의 축적’입니다. 데이터는 입력될 수 있지만, 감각은 삶을 직접 통과하며 축적되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슬픔을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줄 때 느껴지는 그 무거운 공기, 그리고 뉴욕 거리를 함께 걸으며 느꼈던 큰아이의 온기. 이런 것들은 인공지능이 결코 가질 수 없는 ‘진짜 세상의 데이터’입니다. 미용을 꿈꾸는 작은 아이에게도 이 지점은 희망이 됩니다. 기계가 머리카락을 정교하게 자를 수는 있겠지만, 손님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읽고 따뜻한 손길로 위로를 건네는 그 '피지컬한 공감'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능의 시대가 가고 감각의 시대가 온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의 고도화가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안목을 기르는 ‘감각의 세밀화’입니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세밀하게 관찰하고,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억양과 기분까지 느껴보는 훈련. 이것이 인공지능 시대에 살아남을 인간의 유일함입니다.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안에서 저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지능과 노동을 빼면 나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단순히 최신 기술의 습득만이 아닙니다. 기술이 풍요를 주더라도 그 속에서 존엄을 유지하는 용기, 기계가 정답을 주더라도 나만의 질문을 멈추지 않는 지성입니다. 쉰 살의 문턱에서 저는 이제 지능의 외투를 벗고 인간이라는 본연의 살결로 파도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우선 저는 인공지능이라는 파도를 용감하게 올라타보려 합니다. 아이들에게 변화를 요구하기 전에, 제가 먼저 이 새로운 도구를 만지고 부딪히며 나만의 항해법을 찾아야겠지요. 인공지능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날개 삼아 나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증강된 개인’이 되는 것, 그것이 제가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뒷모습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