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9일 (월)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 3차 관람
오늘 뉴욕에는 비가 내립니다. 1일 차의 밤새 내린 눈의 정적도, 2일 차의 말갛게 갠 아침의 투명함도 아닌, 차분하고 묵직한 물기가 도시의 소음을 적시는 아침입니다. 숙소를 나설 때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마치 미술관이라는 성소로 들어가기 전, 마음의 남은 찌꺼기마저 씻어내라는 권고같이 느껴졌습니다.
3일 차, 이제 제 손에서 지도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5,000년의 미로 속에서 기꺼이 길을 잃을 준비가 된 여행자에게, 비 오는 날의 메트(MET)는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구별된(Set apart) 고요한 숲이 되어 저를 맞이합니다.
오늘 제가 선택한 문장은 ‘경탄(Awe)’입니다.
1일 차에 삶의 전경(Foreground)을 확인하고, 2일 차에 거장들과 고독하게 독대했다면, 오늘은 그 모든 사유를 잠시 내려놓고 오직 눈앞에 펼쳐진 압도적인 미(美)의 실체 앞에 기꺼이 무릎 꿇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다시 찾은 아메리칸 윙의 700번 갤러리, 찰스 엥겔하드 코트입니다. 통창 너머로 보이는 센트럴 파크의 겨울 숲은 비안개에 싸여 수묵화처럼 아스라한데, 그 회색빛 배경 속에서 해리엇 프리슈무스의 <덩굴>은 어제보다 더욱 선명하고 강렬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발끝으로 대지를 딛고 서서, 온몸을 뒤로 젖힌 채 포도 덩굴을 낚아채려는 그 역동적인 S자 곡선. 그 매끄러운 브론즈의 피부 위로 천장의 낮은 채광이 흐를 때마다 조각은 차가운 금속이기를 거부하고 뜨거운 숨을 내쉬는 무용수가 됩니다. 저는 한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조각 주위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바퀴 돌아봅니다. 360도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무너지지 않는 완벽한 균형과 리듬감. 그것은 인간의 육체가 빚어낼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찬가이자, 그 찰나의 움직임을 영원 속에 박제해버린 예술가의 집념에 대한 경탄이었습니다.
그 곁에서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오거스터스 세인트 고든스의 <다이애나>는 당당한 활시위로 공간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습니다. 빗물 섞인 바람이 창밖을 할퀴어도, 이 황금빛 여신은 지지 않는 태양처럼 서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아름다움이란 외부의 환경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내는 존엄함 그 자체라고 말입니다.
이어 시선을 옮겨 만난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의 스테인드글라스 <가을 풍경>은 창밖의 우중충한 날씨를 단번에 지워버리는 빛의 폭발이었습니다.
유리라는 차가운 매질이 이토록 따뜻하고 깊은 색채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붉고 노란 불꽃처럼 타오르는 단풍과 그 사이로 흐르는 푸른 계곡물. 그것은 유화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오직 ‘빛’을 투과시켜야만 완성되는 신의 영역에 닿아 있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예술은 때로 자연보다 더 자연 같은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곤 합니다.
유럽 조각관으로 발길을 옮겨 복도 한가운데 놓인 <데미도프 테이블> 앞에 섭니다. 1845년, 로렌조 바르톨리니가 빚어낸 이 거대한 대리석의 세계는 오늘 같은 비 오는 날 더욱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테이블 한가운데서 입가에 손을 대고 ‘쉿!’ 하는 포즈를 취한 큐피드의 몸짓은 단순히 조용히 하라는 신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소란함을 잠재우고 오직 예술의 본질만을 응시하라는 성소의 명령과도 같았습니다. 풍요 속에 대자로 뻗어 잠든 아이와, 테이블 끝에 아슬아슬하게 웅크린 채 고단한 야망을 품고 자는 아이. 그들의 대비되는 삶을 묵묵히 지켜보는 큐피드의 시선 끝에서, 저는 우리가 삶에서 놓치고 사는 수많은 침묵의 가치를 떠올렸습니다.
그 묵직한 침묵의 여운을 안고 552번 갤러리로 향합니다. 그곳에는 호레이쇼 그리노가 대리석으로 피워낸 순수한 평온, <잠자는 소년(Sleeping Boy)>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턱을 괴고 깊은 잠에 빠진 소년의 얼굴은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쌓인 방어 기제들을 무너뜨립니다. 차가운 돌덩어리 속에서 어떻게 이토록 부드러운 살결과 규칙적인 숨소리를 건져 올릴 수 있었을까요. 소년의 눈꺼풀 아래에는 분명 우리가 잊고 지낸 가장 맑고 투명한 꿈들이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화려한 장식도, 복잡한 알레고리도 없지만 그 단순한 평화로움이 주는 경탄은 그 어떤 대작보다도 길게 제 가슴을 울렸습니다.
이어 만난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투구와 갑옷은 인간의 집념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화려함의 극치였습니다.
실제 전투용이라기보다는 왕의 권위를 선포하기 위한 퍼레이드용으로 제작된 이 갑옷은, 강철이라는 거친 소재를 세밀한 은과 금으로 수놓은 정교한 캔버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갑옷 전체를 덮고 있는 아폴로와 다프네의 신화적 서사와 그로테스크한 문양들은 전쟁의 도구조차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려 했던 당대 장인들의 치열한 예술혼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수백 년의 시간을 견뎌온 차가운 금속 광택은 오늘 같은 빗속에서도 여전히 퇴색되지 않은 권위와 아름다움을 뿜어내며, 관람객인 저를 압도했습니다.
중세관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마주한 성 피르맹 상은 3일 차 여정 중 가장 기묘하면서도 숭고한 경탄의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잘린 머리를 두 손으로 소중히 받쳐 든 채 걷는 ‘세팔로포어(머리를 든 성인)’의 전설. 13세기 석회암으로 빚어진 이 형상은 자칫 잔인하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그가 받쳐 든 얼굴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귀한 평화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공포를 신앙의 이름으로 극복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저 평온한 미소. 비 오는 날의 고즈넉한 조명 아래서 성 피르맹의 눈빛은 마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나직이 읊조리는 듯했습니다.
그 숭고한 여운은 555번 갤러리의 몰도반 가문의 하누카 메노라에서 화려한 축복으로 변합니다.
거의 1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은제 촛대가 뿜어내는 눈부신 위엄. 정교하게 세공된 독수리와 사자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는 이 메노라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며 신념을 지켰던 사람들의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창밖으로 식사하는 사람들을 조용히 내려다보는 이 촛대의 배치는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박물관의 유물이 박제된 존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창 너머의 평범한 사람들을 향해 끊임없이 축복의 빛을 나눠주고 있는 성스러운 등불처럼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정의 또 다른 마침표는 클로드 오귀스탱 케요의 <님프와 조개 분수>였습니다.
머리카락을 짜는 님프의 풍만한 여체와 부드러운 대리석의 질감에 매혹되어 홀린 듯 다가갔을 때, 저는 님프가 손을 얹은 항아리에 새겨진 사티로스의 거친 추격전과 분수 바닥에서 저를 노려보는 사실적인 청동 뱀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관람객인 저에게 건네는 서늘한 경고였습니다. "아름다움은 결코 함부로 범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신성한 영역에는 그에 마땅한 수호자가 있다"는 선언처럼 느껴졌습니다. 님프의 평온함과 뱀들의 날카로움이 빚어내는 이 긴장감 넘치는 대조는,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경탄이 단순히 시각적인 즐거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깊은 경외심(Awe)을 동반해야 함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오늘 여정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제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문 작품은 825번 갤러리의 빈센트 반 고흐였습니다. 그가 생의 마지막 무렵 생레미의 요양원에서 그린 <첫걸음(First Steps, after Millet)> 앞에 서자, 그동안의 긴장이 무장해제 되며 뜨거운 경탄이 차올랐습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드로잉을 고흐만의 강렬한 색채로 재해석한 이 그림 속에는, 텃밭 한가운데서 아이를 향해 무릎 꿇고 두 팔을 벌린 아버지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에 의지해 이제 막 땅을 딛고 일어서려는 아이, 그리고 그 짧은 거리를 세상에서 가장 먼 여정인 듯 숨죽여 지켜보는 부모의 모습. 고흐는 거친 붓질과 찬란한 노란색, 푸른색의 대비를 통해 이 평범한 농가의 일상을 성스러운 종교화의 반열로 끌어올렸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이번 여행에서 찾고자 했던 '경탄'의 실체였습니다. 신화 속 여신의 완벽한 곡선이나 왕의 화려한 갑옷보다 더 저를 압도한 것은, 생명이 처음으로 스스로를 지탱하며 내딛는 저 서툴고도 위대한 '첫걸음'이었습니다. 조카의 탄생을 앞두고 이 그림을 그렸던 고흐의 마음처럼, 저 또한 이 화폭 안에서 우리 삶의 가장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목격했습니다.
미술관을 나서는 길,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3일 전 처음 이 문을 들어섰을 때의 막막함과 피로함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5,000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제가 만난 것은 먼지 쌓인 역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숨 쉬며 우리에게 말을 거는 영원한 생명력이었습니다.
1일 차의 눈(Snow)은 저를 성소로 이끌었고, 2일 차의 맑음(Clear)은 거장들과의 정직한 대화를 허락했으며, 3일 차의 비(Rain)는 모든 군더더기를 씻어내고 오직 아름다움 앞에 침묵하며 경탄하게 했습니다. 렘브란트는 고뇌를, 베르메르는 일상의 기적을, 고흐는 열정을, 그리고 오늘 만난 무명의 중세 조각가와 르네상스의 장인들은 숭고한 신앙과 집념을 제게 나눠주었습니다.
이제 저는 거장들의 숲을 빠져나와 제가 발 딛고 선 가장 확실하고 다정한 전경(Foreground), 고흐의 그림 속 그 아이처럼 이제 막 세상을 향해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는 시은이의 곁으로 돌아갑니다. 미술관에서의 3일은 끝났지만, 여기서 얻은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은 제 지루한 일상을 버텨내게 할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나의 오랜 동경, 메트(MET)에서의 마지막 문장은 ‘아름다움이 준 구원’으로 맺습니다. 빗소리와 함께 잦아든 뉴욕의 저녁, 제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