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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회장이 된다면 지구를 행복하게 만들겠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두 손을 활짝 벌리고 그렇게 외쳤다. 왜 하필 지구였는지, 왜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그 안에는 어린 나름의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새 학기가 되면 학교는 임원선거로 정신없이 돌아간다. 학급 임원은 반을 대표하고, 전교 임원은 학교 전체를 대표한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상담 때 종종 묻는다. “선생님, 이거 결국 인기투표 아닌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친구 관계가 좋으면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늘 강조하는 건 단 하나, 임원선거는 운이 아니라 준비다.
임원선거에는 다양한 아이들이 찾아온다. 조용하지만 책임감 있는 아이, 말이 많아 리더십이 돋보이는 아이, 표현은 서툴지만 친구에게 도움 주고 싶어 용기 낸 아이. 아이마다 강점이 다르기 때문에 공약도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님이 하는 첫 번째 오해는 “재밌고 센스 있는 연설문으로 만들어주세요”라는 말이다. 모든 아이가 무대 위에서 춤추며 농담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조용한 아이에게 화려한 퍼포먼스를 시키는 건, 아이가 가진 모든 가능성을 꺾는 일이다. ‘수학의 정석’처럼 ‘연설의 정석’이라는 게 있다. 화려하면 좋지만, 화려함이 전부는 아니다. 아이에게 꼭 맞는 방식으로 만들고, 아이 스스로 고민한 흔적이 남아 있어야 그것이 바로 진짜 공약이 된다.
우리가 임원선거 원고를 직접 작성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이를 괴롭힌다. 고민하게 하고, 떠올리게 하고, 스스로 만들어내도록 돕는다. “너희 반 친구들은 무엇을 불편해할까?” “반을 위해 너는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뭐라고 생각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공약의 절반은 이미 완성된 셈이다. 코로나19 시기, 쉬는 시간마다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겠다’는 아이가 있었다.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시의성 있는 공약이었다. 아이들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선의 기준은 화려함이 아니라 ‘지금 우리 반이 꼭 필요로 하는 것’을 짚어내는 일이다. 학급 임원 공약은 보통 3개, 원고는 1분 30초가 적당하다. 이보다 길면 지루하고, 짧으면 성의가 없다. 6학년이던 조카가 열심히 준비해 발표했지만 인기 많은 친구가 “그냥 뽑아줘!” 한마디로 당선된 에피소드도 있다. 억울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성과 고민, 진심을 강조한다. 반대로 조용한 아이도 친구들이 원하는 포인트를 정확하게 짚는다면 당선 가능성은 충분하다. 학급 임원 선거에서는 ‘데코’가 중요하다. 데코는 연설의 정체성이다. 요즘 아이들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에 열광한다. 그렇다면 공약에도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다. 하지만 과하면 오히려 비호감이 된다. 아이들 세계에서 ‘오글거림’은 가장 치명적인 리스크다. 적절히, 자연스럽게, 주제와 연결되게. 이 밸런스가 데코의 핵심이다. 예를 들어 케데헌의 소다팝 리듬을 공약 강조 멘트에 살짝 넣는 정도는 좋다. 하지만 전체 춤을 따라하거나 과하게 연출하면 오히려 역효과다. 데코의 기준은 단 하나, 우리 아이의 성격이다. 어울리는 데코만 살아남는다.
하지만 전교 임원 선거는 조금 다르다. 학급 선거가 반 친구들의 취향을 맞추는 일이라면, 전교 선거는 가능성과 현실성이 훨씬 중요하다. 전교 임원은 학교 전체를 위해 조율하는 리더여야 한다. 그래서 공약도 달라져야 한다. ‘내가 쉬는 시간마다 교실을 돌아다니며 창문을 열겠다’는 학급 공약은 전교에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학급 임원들과 협력해 안전한 학교 환경을 만들겠다’는 식으로 바꾸면 가능하다. 전교 공약은 세 단계 기준이 있다.
실행 가능한가?. 학교 전체에 의미가 있는가?. 리더로서의 태도를 보여주는가?
‘딸기,초코 우유데이’를 만들겠다는 공약은 달콤하지만 실행 불가능하다. 실제로 이런 공약 때문에 난처해진 아이들이 많았다. 당선 후 공약 이행을 못하면 친구들에게 실망을 주고 아이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한다. “승부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임원선거는 당선이 아니라 ‘어떤 리더가 되고 싶은지 고민하는 연습’이다. 전교 연설문은 2분 전후가 적당하다. 다양한 학년의 학생들이 듣기 때문에 ‘킬러 문장’ 하나가 매우 중요하다.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그 말 한 애!'로 기억되면 성공이다. 요즘은 토론을 통해 공약을 검증하는 학교도 많다. 이 토론이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아이의 대화력, 협업력, 임기응변, 리더로서의 시각이 모두 드러난다. 연설은 암기해서 진행하는 게 좋다. 아이들은 말한다. “어떻게 외워요?” 하지만 외운다. 간절함은 기억력을 만든다. 암기 과정은 책임감을 만들어주는 시간이고, 그 과정에서 아이는 스스로 리더가 되는 감각을 배운다. 연설을 들어보면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보인다. 어떤 아이는 목소리는 작지만 말의 구조가 탄탄하고, 어떤 아이는 부끄럽지만 끝까지 침착하다. 리더십은 말의 크기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의 진심과 구조에 있다.
홍보 포스터와 피켓 제작은 선거의 하이라이트다. AI 툴로 초안을 만들고, 후보 번호, 이름, 핵심 공약 하나를 넣는다. 포스터는 연설문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한 눈에 들어오는 선명함이 중요하다. 홍보 도우미를 섭외하는 일도 중요하다. 많은 아이들이 “부탁하는 게 부담스럽다”며 망설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 리더십 성장의 핵심이다. 친구에게 “나 좀 도와줄래?”라고 말하는 용기, 역할을 나누고 동선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아이는 단숨에 한 단계 성장한다. 임원선거가 끝나면 부모님들은 결과에 따라 아쉬움이나 기쁨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선거는 당선이 목표가 아니라, 아이를 성장시키는 과정입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아이는 자신을 소개하는 법, 친구를 바라보는 시선, 책임의 무게, 협업의 구조, 말의 진정성을 배운다. 임원선거는 아이가 처음 경험하는 사회 참여다. 부모의 개입이 과하면 배우지 못하고, 방임하면 겁이 난다. 부모의 역할은 길을 밝혀주는 조력자, 생각을 끌어내는 질문자, 현실성을 함께 검토하는 동반자다. 학급,전교 임원선거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하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나는 어떤 리더가 되고 싶은가?” 이 질문을 오래 고민한 아이는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리더다. 임원선거는 아이가 진짜 자기 목소리를 찾는 첫 번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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