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앞에서, 육절기 앞까지

by 파파라파랑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여름,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섰습니다.

집 앞 고깃집으로 면접을 보러 가기 위해서였죠.

투잡으로 병행하기에 딱 알맞은 파트타임 아르바이트였습니다.

사장님은 제 나이를 맘에 들어하셨습니다.

홀서빙하기에 너무 어리지도, 많지도 않은 숫자였죠.


그곳에서 알바를 시작하게 되었고, 저의 하루는 바쁘게 흘러갔습니다.

낮엔 노트북을 열어 상품등록과 주문관리를 하다가,

저녁이 되면 고깃집으로 출근하러 집을 나서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장님이 저에게 솔깃한 제안을 하셨습니다.

정직원으로 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죠.


거의 두 배 가까이 오를 월급에 무척 고민이 많았습니다.

선뜻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유는 근무시간 때문이었습니다.

파트타임에 비하면 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시간이었고,

휴무도 일주일에 단 한 번이었지요.


하지만 해외구매대행 수입이 녹록지 않아 카드값이 밀리기 시작했던지라,

회사원 때 받았던 금액보다 더 높은 월급에 혹해, 정직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정조율만 잘한다면, 투잡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죠.


정직원이 된 저는, 홀서빙뿐만 아니라 주방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고깃집의 매니저나 다름이 없었던지라, 하던 일도 몇 배는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막상 새벽에 정시 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쓰러져 잠들기 바빴습니다.

출근시간이 다가와야 겨우 잠에서 깨어 집을 나서곤 했지요.


저의 체력은 고깃집에서 온통 쏟아지게 되었고,

따로 시간 내서 별도의 활동을 할 여력이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스토어 관리에 소홀해지게 되었지요.


더 이상 시간적 마음적 여유도 없었던 저는

결국 해외구매대행 사업자를 폐업처리했습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해서 육절기로 고기를 썰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문득, 제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몇 달 전만 해도 컴퓨터 앞에 앉아 디자인을 하는 것이 저의 밥벌이였는데,

사업을 하겠다며 퇴사를 하고선, 육절기 앞에 서서 고기를 썰고 있는 제 모습을요.

마트의 정육점 아저씨가 만지던 기계를, 이젠 내가 날마다 만지며 밥벌이를 하고 있다니요.


자각을 하고 나서 처음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이 참 재밌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더군요.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식당일로 체력이 남아나질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의 개인적인 활동을 할 시간과 정신적, 체력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돈은 궁하지 않았으나, 이젠 반대로 미래가 보이지 않았지요.


제 나이는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빨리 무언가를 시작해서 자리 잡기 시작해야 할 시기였지요.

적어도 제 주변 또래들을 보면 제 각각의 길을 찾아서 가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저를 제치고 나아가고 있을 때,

저는 고깃집에서 육절기로 고기를 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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