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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뻔펀한 홍사장 Aug 03. 2024

그 남자의 신념

매일 칼을 가는 남자

#중식도


남편은 출근하자마자 칼을 간다.

한가함이 뻔히 보이는 날도, 썰어야 할 게 별로 없는 날도 어김없이 칼을 간다.


숫돌에 직접, 정성스러운 손길로 칼을 다듬는다.

칼날의 예리함에 따라 채소의 단면이 달라지고, 식감과 물러짐의 상태가 좌우된다고 한다.


2년 전, 오픈기념일 선물로 손님께 받은 중식도는 벌써 1센티 이상 폭이 짧아졌다. 새끼손가락 한마디 정도는 숫돌의 입자와 함께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고추잡채


“이것 좀 먹어봐요. 피망 맛 좀 체크해 줘.”

남편이 방금 요리한 고추잡채를 내민다. 언뜻 보기에 외형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ㅡ“아, 피망이 좀 덜 아삭하네. 근데 나가도 될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한데요?”

맘에 안 들어. 다시 해 드려야겠어.”


고추잡채가 주문으로 들어왔다. 요 며칠 피망이 나가지 않아 숨이 죽어있었나 보다. 남편은 망설임 없이 다 쏟아버리고, 재빨리 다시 조리한다.

버리지 말라고, 내가 먹어도 된다고 하고 싶지만, 남편에게는 통하지 않음을 안다.


더 초록초록하고 탱글 하게 살아있는 고추잡채가 맛있게 볶아져 나왔다.

나는 자부심이 상승한 마음으로, 고추잡채를 손님께 내어드린다.


#신메뉴


메뉴판을 다시 만들었다.

원래는 없던 메뉴들 중, 손님들이 자주 찾는 음식을 새로 넣기로 했다.


주문했던 돈까스도 맛 체크에 들어간다.

직접 만들면 더 맛있지만, 괜찮은 완제품이 있으면 사용해 보고자 여러 브랜드의 제품을 주문해 봤다.

맛과 식감은 기본이고, 등심 함유량은 무조건 체크포인트다.


튀김옷이 두껍지는 않은지, 튀김옷과 고기가 분리되지는 않는지, 고기가 다 갈려진 민찌 형식의 돈까스인지, 소스와 잘 어우러지는 맛인지.

여러 회사의 제품을 며칠 동안 시식하며 잘 골라봐야 한다.


“여보야, 닭발 도착했어, 냉동실에 좀 정리해 줘요.”

ㅡ“네네.”

새로 주문한 무뼈닭발도 왔구나. 매운맛, 안 매운맛, 마라맛 등등...


에공~ 이번주는 내내 돈까스를 먹었으니, 다음 주는 내내 닭발 시식이 되는 건가?

흠, 매운맛은 힘드니 쿨피스 자두맛이라도 사놓아야겠다.


#스팸


“이거 햄두부김치, 무슨 햄이에요?”

ㅡ“아, 스팸이에요. 저희는 스팸만 써요.


가게 메뉴에는 햄섞어찌개도 있고 햄두부김치도 있다. 햄이 들어가는 다른 메뉴도 여러 가지가 있다.


육류 함유량도, 맛도 다르기 때문에 남편은 항상 스팸을 고집한다. 코로나로 수급이 어려워져 스팸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 구매하기 손 떨렸을 때에도 변함이 없었다. 기본맛이 달라지는 게 싫기 때문이라고.


남편 왈,

“스팸 안 쓰면서 스팸김치찌개라고 써 붙인 가게가 나는 싫더라. 그냥 햄김치찌개라고 하든지.”


#새벽 4시의 남자


“2시에 손님이 없으면, 3시까지 기다리면 되지. 3시에도 손님이 안 오면 4시까지는 기다려 봐야지.”

오후 4시가 아닌, 새벽 4시를 말하는 것이다.


가게의 영업시간은 오후 5시부터 새벽 5시까지다.

자정까지 개시를 못하고 있다가 새벽 1시부터 하루 매상을 올린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만큼 기약 없는 기다림이 다반사고,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자영업의 힘든 점인 것 같다.


이웃 가게 사장님들은 손사래를 친다.

“몇 시간 손님 없으면 얼른 마감하고 튀어야지, 어우~ 난 그렇게까지는 못 버텨. 대단해, 대단해~”


남편은 손님이 있건 없건 마지막 주문시간인 4시까지는 가게를 지킨다, 그것이 자신의 퇴근시간이라고 여기며.


남편이 장사꾼 마인드가 부족한-뼛속부터 요리사인- 좋은 건지 아닌 건지, 자영업이 처음인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모를 것 같다.


때로는 답답해 보이고, 이 길이, 이 방법이 맞나 싶기도 하지만, 그의 뚝심이 마냥 미련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소스로 맛을 가리면 손님들은 모르실 수도 있지만, 식재료의 퀄리티를 낮추면 마진이 더 남는다는 것을 알지만 음식에 장난치지 않는다.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며 만든다.


말 그대로 <자-自,self-영업>이니까.

잘하는지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니고, 퇴근시간을 정해준 것도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스스로 꾸려나가야 하는 내 가게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남편은 매일 칼을 간다.

양심에 흠집을 내지 않기 위해 날을 다듬는다.


신념을 지키며 일상을 단단하게 해 주는 남편에게 글에 기대어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다.

단골손님께 선물받았던 풍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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