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연하게 설거지옥으로 향하는 사랑
"사랑이란,
너를 대신해 의연하게 설거지옥으로 향하는 것이자
내일의 너를 대신해,
오늘 쓴 기구 워싱을 내가 해놔 주는 것이다."
이제 막 인턴으로 들어온 아가 하나가 투덜댄다. 실험에 사용한 도구들을 워싱을 하다 보니 옷 앞이 다 젖어버렸다고 한다. 내가 관리하는 인턴은 아닌지라 대꾸를 해줘야 하나,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나 망설이는 순간, 내 옆자리의 A가 담당 사수답게 프랑스인 특유의 도도한 표정으로 '그건 너의 일이잖아.'라고 한다. 방금까지 불쌍한 토끼눈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던 인턴 아가는 금세 입을 뾰로통하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리로 돌아간다.
사실 내가 근무 중인 바이러스 센터는 프랑스에서도 큰 기관에 속하기 때문에 고압멸균기(오토클레이브)에 돌릴 기구들은 워싱을 해주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 그래서 기본적인 소독만 해도 되는 기구 몇 개만 인턴 아가들이 담당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쓰고 보니, 뭔가 내리 갈굼이나 선배들의 텃세 같다. 하지만 스스로 변론을 해 보자면, 이곳에 익숙지 않은 인턴 아가야들이 워싱을 하면서 기구 이름도 파악하고, 기구 부위도 익혀보라는 뜻이기도 하고, 또 따로 시간을 내어 가르쳐주는 선배에게 도움을 주면서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좋은 취지도 있다.
취지야 어떻든, 사실 워싱은 사소하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면서, 해도 해도 쌓이고, 해놔도 티도 잘 안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이다. 마치 설거지처럼 말이다.
퇴근 후 간단히 저녁을 차려먹고, 설거지 당번인 오빠는 주방으로 향한다.
나는 바로 책상에 앉아 촤르륵 각종 펜과 스티커들을 꺼냈다. 다이어리를 꾸미고, 쓰고 하면서 오늘 하루 꼬깃꼬깃 묵혀둔 마음을 풀어내는 나만의 휴식루틴이다.
"애피, 노래 @#($)!_*"
"응? 뭐라고?"
" 노래!@$)@!)_"
달그락 거리는 그릇소리와 세차게 틀어놓은 물소리에 부딪혀 오빠 말의 뒷부분이 흐릿하게 들린다. 그렇지만 아마도 블루투스 스피커로 노래를 들으며 하라는 따뜻한 배려의 말이라는 것을 안 들려도 알 것 같았다. 7년간의 선후배사이와, 3년간의 연애, 6년간의 결혼생활을 하니 대게 이런 상황에서 그가 저 사랑스러운 설거지 소리와 함께 외치는 마음이 무엇인지 정도는 예상 가능하다.
"잘 안 들렸지?"
평소엔 귀가 좋지 않아 착용하는 보청기를 빼두는 데다가 소음 하 청력 수치가 특별히 더 나쁜 상태라는 걸 아는 오빠가 내가 미쳐 다 못 들은걸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응."
"여기 이거로 노래 틀고, 눈 나빠지니까 스탠드 켜고 하라고."
"귀찮은데."
"이왕 하는 거 애피가 좋아하는 환경에서 하면, 기분이 더 나아지잖아. 초도 켜줘?"
"됐어~ 괜찮아."
방금 끝낸 설거지 덕에 티셔츠 앞부분이 촉촉이 젖은 그가 후식으로 잘게 잘라온 납작 복숭아를 입에 쏙 넣어주면서, 환경적 조건을 하나씩 바꿔주고 있었다. 실험은 표적대상에 대해 적절한 조건을 찾아 설정하고 가장 알맞은 결괏값을 구해내는 일인데, 오빤 그런 면에서 타고난 '나' 연구자다. 그리고 이게 내가 제일 사랑하는 오빠모습이면서, 동시에 오빠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모습이다.
설거지가 사랑고백이 된 건 프랑스로 와 둘이 살게 되면서부터이다.
프랑스로 와서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원래 직장 내에서 해결하던 아침과 점심, 저녁들을 온전히 집에서 해결해야 했다. 별일 아닌 것 같지만 이건 우리 부부에게 한국으로 돌아갈지를 고민하게 만들 정도의 중요한 문제였다.
프랑스로 오는 결정을 할 때는, 고려 대상에 조차 들지 못한, 별일 아니라 여긴 일이, 막상 닥쳐보니 별일이 아닌 일이 아니었다. 퇴근 후 마음의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에서 무언가를 요리하고, 깨끗이 닦아내주는 일이 엄청난 일이라는 건, 프랑스에 온 첫 달이 채 지나기 전부터 이미 느끼기 시작했고, 배달 음식이 마땅치 않은 이곳에서 이전 설거지가 끝나지지 않으면 다음끼의 우리 식사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워싱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순간 실험진행이 멈춰져야 하는 것처럼.
게다가 삼시 세끼를 집에서 차려 먹어야 한다는 얘기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하루종일 수술과 실험이 잡혀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눈 뜨면 아침을 준비하고, 어어 하다 보면 점심 준비를 해야 하고, 그러다 퇴근하면 또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 설거지와 워싱은 그 모든 과정 전, 후로 반드시 수반되는 필수 과정인데, 요리를 준비할 때도 발생하고, 밥을 다 먹은 후에도 발생한다. 가장 기본적인 일이지만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쯤, 밥을 먹으며 아이패드로 같이 보던 영화 '신과 함께'의 나태지옥이 생각났다.
"오빠, 집안일 자체는 진짜 나태지옥 같아. 도대체가 끝나지 않고 계속 돌아"
"대한민국 엄마, 아빠들은 호칭부터가 이미 나태지옥 패스권이 돼야 한다고 본다."
"동감."
나의 동감에 피식 웃던 오빠는, 그런 의미에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고 싶다더니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의 내 당번이었던 설거지를 끝내고, 지금처럼 티셔츠 앞이 촉촉이 젖어 돌아왔다. 진짜 로맨틱한 오빠다운 사랑고백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한 4년간의 설거지는 오빠가 도맡아 해주고 있다.
워싱은 보통 가장 신입들이 하는 일이라, 연차로 따지면 오빠보다 후배인 내가 해야 할 일이건만, 일단 지금까진 싫은 내색 한번 없이 뚝딱뚝딱 끝내준다.
"그냥 손으로 먹어도 되는데.."
방금 내 입속에 넣어준, 후식으로 가져온 잘라진 납작 복숭아들이 내가 아끼는 접시에 오밀조밀 올라와 있었다. 심지어 포크와 함께!
"포크로 먹고 예쁜 접시에 먹어. 오빠가 워싱해 줄 거야"
"찐 사랑이네"
우리끼리 눈을 마주치고 피식 웃는다.
누군가 나에게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제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를 대신해 의연하게 설거지옥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내일의 너를 대신해 오늘 쓴 기구 워싱을 내가 해놔 주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