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닮아가는 과정
"어설픈 반반 놀이를 하다가 싸우는 것보다,
차라리 서로에게 존중받고 싶은 부분을 골라,
그것만 똑 잘라 상대에게 넣어
새로운 유전자를 만들어내는 게 덜 힘들 때가 있다."
나의 첫 논문 준비가 한창이던 때 일이다.
대부분의 논문 결과(figure)는 다 완성되었는데, 그 결과를 검증하는 과정에 필요한 클로닝(clonning)에 발목이 잡혀 1달을 그냥 보내고 있는 상태였다.
클로닝(clonning)이란, 고등학교 생명과학 2에서 배우는 유전자 재조합 기술 중 하나이다.
현실에서는 이 기술은, 어떤 단백질 A가 진짜 그 일을 하는지 확인하는 용도로 필요하다.
그래서 보통 사람의 유전자에서 단백질 A가 만들어지는 유전자 부분만 땡강 잘라내고, 이걸 벡터(vector)라고 하는 동그랗고 간단한 유전자에 쏙 집어넣어 새로 합성한 유전자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 새로 만들어진 유전자를 생명체에 삽입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되면 이 벡터는 생전 만들어낸 적 없던 단백질 A를 만들어 낼 테니, 얘가 원래는 안 하던 행동을 하면 바로 그게 우리가 확인하고자 하던 단백질 A의 기능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원리라고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하튼, 이 기술은 그래서, 새로 찾은 유전적 물질의 기능을 검증하는데 꼭 필요한 과정인데, 이걸 만드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잘 안 잘라지기도 하고, 다른 엉뚱한 곳이 동시에 잘리기도 하고, 자르긴 잘 잘렸는데 벡터에 잘 안 들어가지거나, 엉뚱하게 붙기도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분명 원리는 간단한데 말이다.
나 역시 결국, 저 1달 이후로도 꼬박 2달을 선배들과 교수님을 붙잡고 물어도 보고, 혼자 울고 매치고 엎어뜨리고 할 수 있는 오만 것들은 다 해본 뒤에야 성공할 수 있었지만, 아직도 도대체 왜 안 됐던 건지, 왜 이번엔 성공한 건지를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때보다 년차수가 근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다른 실험적 기술이면 모를까 클로닝만 하려면 며칠간은 긴장이 되고 걱정이 된다.
원래 있던 거에 새로운 무언가를 잘라 붙여 넣어준다는 건, 뭐든 이렇게 어려운 일인 것이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왼팔 팔꿈치 안쪽 내측상과부터 척골 쪽 신경이 지릿지릿하게 아파왔다. 별일 아니겠지 싶었던 통증이 팔뚝을 거쳐 4번째 손가락까지 타고 와, 새끼손가락 마저 저리고 붓기 시작할 때쯤 아마도 내측상과염이 왔구나 싶어 그제야 부랴부랴 소염진통제를 복용했다. 갑작스러운 통증 호소에 오빠도 놀라 나에게 원인이 뭔지를 물어보는데 도통 짚이는 게 없었다.
내측상과염은 주로 팔을 많이 사용하다 보면 발생한다는데, 요즘 내 일과를 아무리 찬찬히 훑어봐도 그럴만한 일이 없었다. 오히려 요즘엔 직장에서조차 손 쓸 일이 훨씬 줄어들었고, 브런치도 블로그도 심지어 다꾸마저 손 놓고 쉬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다 싶었다. 퇴근길에 찾지 못한 내 병 원인이 노화 아니냐, 퇴행성 아니냐며 오빠와 슬픈 농담을 주고받으며 집으로 돌아와 핸드폰 속 '소환사 협곡'에 도착하는 순간! 찌릿 하는 느낌에 핸드폰을 놓치면서 내 내측상과염의 원인을 찾았다. 너였구나..
사실 나는 오빠를 만나기 전엔 게임포비아 였다. 원체 못하기도 했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서로 하트를 주고받던 게임이 유행했을 때조차 나는 열외였다. 도무지 왜 현실에도 없는 가상의 것에 열광하는지 이해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런 내가 아마추어 게이머를 꿈꾸는 오빠를 만난 거다. 다행히 오빠는 나랑 만나는 동안에는 게임으로 속을 썩인 적은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더 내가 게임에 거부반응 없이 스며든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나와 11살 차이의 동생 2를 통해서나 오빠가 게임을 좋아하는 사실을 알았을 정도였다. 기념일 선물을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나는 동생 2를 통해 오빠가 디아블로 전 시리즈를 보유하고 있으며, 스타크래프트를 매우 좋아하고, 포트나이트부터 젤다, 롤, 데드셀 등등 편식 없이 모든 게임들은 다 섭렵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내가 바쁜 시기에 연락이 잘 안 되거나 할 때에도 보채지 않고 잘 기다려준 이유가 그거였구나 싶었다.
그렇게 매 기념일 선물이 쉬워졌고, 오빠는 게임타이틀을 사주는 여자친구를 얻었다.
하지만 사실 그때에도 내가 게임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내가 게임을 하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도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갑자기 어느 순간, 그냥 별일 아닌 날이었는데, 오빠와 동생 2만의 저 너무너무 즐거워 보이는 세계에 들어가 보고 싶어 졌고, 두 사람은 두 팔 벌려 격하게 환영해 줬다. 그 이후론 이렇게 관절염까지 생길 만큼 최선을 다해 놀아주는(?) '게임하는 아내'가 되었다.
오빠의 게임게임 유전자가 내 유전자에 잘 클로닝이 된걸 검증한 순간이다.
처음 클로닝을 했던 저때에, 내가 선배들과 교수님께 클로닝을 할 때 제일 필요한 게 뭐냐는 질문을 했었다. 뭐부터 원인분석을 해야 하는지 따지고 들어야 해결이 날 것 같아서였다. 그때 내가 들은 대답은 '시간을 가지고 여러 번'이었다. 지금 나 또한 클로닝이 안된다고 징징 대며 날 찾아온 박사과정 K에게 프랑스어와 영어라는 다른 언어로 같은 말을 해주고 있다.
"효소들에 아무 문제없는지 체크했으면, 조금씩 조건을 바꿔가면서 다시 천천히 시도해 봐 조급해 말고"
"닥터 T, 아무리 해도 안되는 거 같아"
"잘 잘리고 잘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찾아보고, 될 거라고 믿는 것도 필요해!"
학생 K는 예전에 내가 그런 것처럼 안 믿는 눈치였지만, 별수 있나.
부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서로 맞춰 나간다는 약간 추상적인 말을 시도해 보려 어설픈 반반 놀이를 하다가 싸우는 것보다, 차라리 서로에게 존중받고 싶은 부분을 똑 잘라 상대에게 넣어 새로운 유전자를 만들어내는 게 만족도도 높고 덜 힘들 때가 있다. 물론 클로닝을 할 때처럼 조급해하지 않는 마음과 시간, 그리고 잘 잘리고, 잘 들어갈 수 있게 조금씩 조건을 바꿔보면서 꾸준히 시도해 볼 수 있는 끈기는 필수다.